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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 29항-32항
   함세웅 신부   2004-06-28 15:09:40 , 조회 : 1,918 , 추천 : 276

과연 사람은 모두 평등한가
(사목헌장 29항)


이론과 원칙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모순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갈등과 고민 그리고 회의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순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우리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노력이 바로 정의의 실현입니다. 평등과 정의는 이렇게 맞물려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사상은 만인평등이며 이것이 또한 세례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세례때에 모두 물 속에 잠기거나 물로서 죄를 용서받는다는 성사적 징표가 바로 만민평등의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 바오로는 이점을 분명히 그의 초기 작품 갈라디아 3,28에서  분명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례란 삼중의 차별성, 곧 유다인과 이방인,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타파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장엄하게 선포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의 실천적 원리인 만민평등사상을 모든 면에 적용하면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4단락으로 이루어진 사목헌장29항은 바로 평등성을 정의의 관점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만민평등사상과 개성의 차이성
1. 무엇보다도 사목헌장은 하느님의 닮은 꼴인 사람의 기원과 목적과 함께 그 존엄성에 기초한 만민평등사상을 토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계적 획일적 원리가 아닌 각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차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평등의 원리는 차별을 타파할뿐 개인의 성품과 개성, 능력 그 차이는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만민평등과 각 개인의 차이성을 함께 인정하는 슬기를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차별은 그 어떠한 것이든 타파해야 한다.
2. 만민평등의 원리는 인간의 기본권, 그 존엄성, 생명의 귀중함을 최우선의 가치로 손꼽고 있습니다. 그 어떠한 것이든, 그 어떠한 이유로든지 내가 남보다 낫고 그래서 내가 남을 경시하고 무시하고 차별한다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 가장 큰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핵심인 세례의 가르침에 위배된 것으로 곧 하느님을 배반하고 하느님을 모욕하는 엄청난 죄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별로 깊이 생각하지 못한 채 참으로 부끄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입으로만 외우는 만민평등이 아닌, 구체적 현실에서 온갖 차별을 타파하고 진정한 평등의 원리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사목헌장은 구체적으로 많은 예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차별, 문화적 차별 또는 성별, 인종 피부색, 지위, 언어, 종교 등에 기인한 그 어떠한 차별이든지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사회의 병폐로 꼽히는 지역차별, 신분차별, 성차별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근원적 퇴치를 위해 온힘을 쏟아야 합니다.

차이와 차별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3. 물론 사람은 각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점이 차별성으로 이어져서는 결코 안됩니다. 사실 차이는 사람의 모습과 같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지만 차별이라는 것은 사람에 의해 이룩된 편견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사회적 정치적 노예화를 거슬려 투쟁해야.
4. 네 번째 단락은 결론으로 인간의 제도 즉 가정, 학교, 사회 단체, 정부, 국가, 교회들은 모두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해야 하며 인간을 그 어떠한 이유로든지 노예화하고 차별한다면 끝까지 투쟁해야 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평등을 기초로 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룩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안에 한 자녀이며 같은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와 연대적 책임성
(사목헌장30항)


개인의 존엄, 공동체의 가치
사목헌장의 주제어는 인간의 존엄입니다. 이에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지성과 양심과 자유를 지닌 인간의 위대함을 예찬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개인의 삶, 구체적으로 너와나, 남자와 여자 등 개체를 통해서만 이해되고 확인되며 종합되는 개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개인의 권리, 존엄, 의무 등을 언급하게 됩니다. 따라서 개인은 존재론적으로 사회와 국가 등 공동체 보다 앞서 존재하며 우선의 가치를 지닙니다. 한 인간의 생명과 가치가 우주만물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곧 모든 것이 개인을 위한 보조적 요소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보조성의 원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개인의 가치를 강조하는 보조성의 원리에는 개인주의라는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개인주의란 바로 일그러진 개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는 또다른 개인 곧 이웃을 배제하고 거부하며 스스로 자신 안에 갇히는 우를 범합니다. 30항은 바로 이점을 일깨워줍니다.
때문에 우리는 개인 권리와 이웃의 것이 함께 보장되며 함께 성장하는 공동선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연대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공동선과 연대성안에서만 참된 정의와 사랑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행위에서 동기를 규명할 때 사적 또는 개인주의적 목적이 이웃을 위하고 공동체를 위한 것보다 우선할 때 비록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도덕의 관점, 또는 하느님의 시각에서는 하나의 사욕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사리사욕이란 말을 잘 압니다. 이익도 좋고 의욕도 좋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개인주의가 됩니다.

개인욕49%, 공동체 헌신51%라는 주식의 원리
요사이 많은 이들이 주식에 투자하여 이익도 보지만 때로는 손해도 봅니다. 그런데 주식회사의 경우, 누가 만일 한 회사의 주식을 51% 갖고 있으면 그는 회사의 운영권을 갖고 주도합니다. 나머지 49%의 주식을 가진 이는 불과 2%의 주식이 모자라지만 결국 운영권을 갖지 못합니다. 이 원리를 개개인의 덕행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중심의 삶을 삽니다. 그리고 늘 개인 이익과 욕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늘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공동체를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때문에 개인의 자기애와 공동체를 위한 사랑의 삶 안에는 늘 일정한 긴장과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긴장극복을 위한 묘안이 바로 주식의 원리입니다. 자신을 100% 포기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51%의 포기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자기중심, 자기애의 삶을 49%만 간직하고 나머지 51%는 이웃을 위한 사랑, 곧 공동체를 위해서 내어놓는 일입니다. 이 경우 자기애와 이웃사랑은 불과 2% 차이이지만 51%의 이웃사랑과 공동체헌신이 그 삶을 주도하기에 나는 결국 개인주의를 극복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한, 개인을 위한 몫으로 49%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2%를 더 내어놓을 수 있는 단순한 원리, 이것이 바로 사랑의 용기이며 공동체를 위한 헌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공동선을 위해 공공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법준수와 납세는 물론, 교통질서와 공공 안녕을 위해서 작은 일에까지 남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거리정화와 운전법규를 준수하고,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언동을 피하고 모든 면에서 친절하고 예의 범절을 지키며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삶이 바로 개인주의를 극복한 성숙한 사람의 삶입니다.


책임과 참여
(사목헌장 31항)

제때에 응답하는 자세
책임(responsabilitas)이라는 라틴어 단어는 응답하다(respondere)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응답이라는 말은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인간의 신앙적 자세를 말합니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사람은 역사의 과정에서 우주자연과 사회적 환경 등에 의해 늘 도전(challenge)을 받게 마련이며 이 도전에 어떻게 응답(response) 또는 응전하느냐에 따라, 살아 남으면 문화(culture)로서 존속하고 만일 패배한다면 그 문화는 결국 사멸되어 버린다는 그 특유의 역사원리를 제시한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이와 같이 누구나 부르심과 응답의 과정 속에서 살아갑니다. 부모가 부르고, 자녀가 부르고, 친구가 부르고, 세상이 부르고, 역사와 현실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부르심에 우리가 제때에 응답한다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성숙과 창조적 삶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제때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은 파멸을 가져올 뿐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제때에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기본도리인 개인의 책임, 사회적 책임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그 소리에 응답해야 합니다. 순천(順天)이라는 표현과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라는 섭리에의 신뢰가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신앙인은 동시에 시대의 요구, 이웃의 요구, 사회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신앙은 꼭 사회적 책임을 수반합니다.
사목헌장31항은 바로 인간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책임자각은 무엇보다도 귀 기울이는 자세, 눈여겨보는 자세에서 확인됩니다. 무엇보다 양심의 소리, 이웃의 소리, 이웃의 요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또한 문화적 교양이며, 인격성숙을 위한 참 교육입니다. 사실 만일 누구든지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경우에는 그 사람에 대해 결코 신뢰와 사랑의 마음을 지닐 수 없습니다.
요사이 젊은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잘 안듣는다고 우리는 개탄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뜻을 듣지 않고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한 것인지 너무도 자명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늘의 뜻을 따르고 시대적 요구에 제때에 응답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이것이 참 신앙이며 참교육입니다.
인격적 자유와 적극적 참여
책임이란 또한 이웃사랑과 이웃을 위한 봉사와 동의어입니다. 사람은 물론 이를 수락할 수 있고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수락하는 자유는 창조적 자유로서 인간의 유대를 강화하며 가정과 세상을 발전시키지만 응답을 거부하는 자유는 오히려 이기적 자세로 고립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고립은 결국 인간을 작게 만들며 인격의 파괴를 가져옵니다. 책임과 자유의 끈끈한 관계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편 응답키 어려운 상황도 있습니다. 아니 불가능한 경우라 생각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응답했다면 그 응답은 가히 초인적으로 참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변모합니다. 희생과 헌신의 모범인들, 살신성인의 주인공들, 순국선열과 순교자들, 역사에 감동을 준 숱한 무명의 실천자들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책임 완수를 통해 인간은 더욱 성숙되고 아름답고 강한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때문에 사람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맡은바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참여라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에 언급된 충실한 종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또는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도 바로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으로 이 참여의 원리를 확인하는 말씀입니다. 민주주의를 우리는 참여의 정치라고 말합니다. 가정은 물론 국가, 사회, 직장 그리고 교회의 일에 함께 참여하며 창조적 결실을 이루도록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행동하는 창조적, 생산적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와 인간, 예수와 공동체
(사목헌장 32항)

사람은 함께 살아갑니다. 인간의 생명, 그 존재는 부모의 삶에 기인하며 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사회성과 연대성을 가정에서 처음 체험합니다. 그리고 이웃과 함께 하는, 이웃의 가정을 체험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사회적 도덕적 책무를 익히고 깨닫습니다.
사회는 인간의 삶의 터전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사회성이란 인간의 필연적 상황으로 제2의 본성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과 사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러한 연대성과 사회성에 기초하여 구원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다민족을 선택하셔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개인의 성덕과 모범이 물론 중요하지만 유다공동체 전체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의화된 구원의 삶을 살도록 재촉하셨습니다. 본질적으로 구원사에서 펼쳐진 유다백성의 삶은 공동체 전체가  함께 해야 한다는 연대성, 단체성 또는 집단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뜻에서 오늘날 이기주의에 기초한 개인주의는 모두 떨쳐버려야 하며 특히 공중도덕과 공익 등을 소홀히 하는 우리 국민은 더욱 깊이 반성할 일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개인적 차원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공동체 전체와 관계된 연대적 차원 하느님임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나의 하느님’이 아닌 ‘우리의 하느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중개자이신 예수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연대성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몸소 사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분이 취하신 인간성은 바로 어느 한 개체성이 아니라 너와나, 그리고 인간 모두를 포괄한 공동체성입니다. 따라서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는 바로 그 인성을 통해 우리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그 인성은 바로 전 인류의 집약이며 응집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인성과 함께 신성을 지닌 분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의 인성은 모든 인간이 예수와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연대적 관계를 확인해주며 예수의 신성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 긴밀한 일치를 이루는 신적 차원의 삶을 확인해 줍니다. 예수께서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이심은 바로 그의 인간성 그리고 신성에 기초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시기에 인간과 연대를 이루고 또한 그분은 하느님이시기에 그 신적 능력으로 인간을 하느님께로 끌어올리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매개사상입니다.
그뿐아니라 예수께서는 인간이시기에 인간의 모든 조건 곧 가정, 고향, 사회성, 사회규범, 전통, 당시의 현실 등 이 모든 상황에서도 하느님과의 본질적 관계를 우선하시면서 우리에게 모범이 되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라야 함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인체의 비유, 사랑의 원리
또한 예수께서는 온세상, 온인류를 가정에 비유하시며 하느님을 부모로 모시고 우리 모두가 한 형제자매임을 역설하시면서 모름지기 서로 사랑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바로 이웃사랑, 형제자매사랑입니다. 이웃사랑이 바로 연대성의 기본원리입니다. 아니 연대성과 이웃사랑은 바로 동의어입니다. 이웃사랑은 인간이 실천해야할 기본적 덕행이며 의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인류공동체를 인체에 비유하여 그리스도자신이 머리이고 우리 각 사람은 그 지체로서 하느님 안에 한 몸을 이룬다는 신비체(神秘体)의 원리를 바오로 사도를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유기적으로 결합된 하느님의 몸, 자연과 우주생명체에서 한 생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인류는 모두 하느님의 한가족, 그리고 한몸의 지체들이며 한가정의 형제자매들입니다. 누가 제 몸을 미워하고 제 형제자매와 다투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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