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udium et Spes Pastoral Institute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 33항, 34항 (1) (2) (3)
   함세웅 신부   2004-06-28 15:13:33 , 조회 : 1,995 , 추천 : 329

인간의 창조력
(사목헌장 33항)


사목헌장 1부는 이론편으로 교회와 인간이라는 큰 주제아래 1장 인간의 존엄성(12-22항), 2장 인간공동체(23-32항) 그리고 3장 우주 안의 인간활동(33-39항) 그리고 4장 현대세계 안의 교회의 사명(40-45항)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2장 인간공동체까지 다루었고, 앞으로는 3장 인간활동의 우주적 차원과 4장 현대세계와 교회를 다루게 됩니다.
과학문명의 발전 앞에서
가정, 직장, 사회 그리고 과학, 문화, 예술, 정치, 경제 등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과 자연 또는 인간과 우주라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또한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의의와 목적을 지니고 있는가라는 철학적 실존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개개인의 노력 결과로 우리는 현대 과학문명이라는 기적과 같은 현실을 이룩하고 있습니다. 사실 젊은이들의 생활문화는 이제 기성세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통신(IT), 곧 컴퓨터, 인터넷 등 전자문화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세대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은 말 그대로 새롭습니다. 기성세대의 우려와 염려는 구세대의 것일뿐 젊은이들은 새로운 문화의 숨결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기성세대는 신세대의 생활양식에서 도덕적 문화의 종말이라는 불길한 징조를 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마찰과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문명사는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간의 갈등과 마찰을 겪으며 진전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바로 21세기 과학문명시대에 살면서 전자문화통신시대로 옮겨가는 그 전환점에 살고 있기에 그 불안과 염려를 더욱 실감하고 있을뿐입니다.
어쨌든 오늘의 현실은 인간의 능력에 의한 과학 기술혁명의 결과입니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에 도전하여 그것을 이루어내고 있는 이 현실입니다. 곧 세계가 1일 생활권으로 진입하여 세계화, 지구촌화는 사실상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이제 초음속 비행기로 단 몇 시간만에 또 대륙을 횡단하게도 됩니다. 또한 유전자조작 세포이식 등 생명공학의 힘으로 사실상 생명창조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인간의 능력, 과학의 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공학의 미래에 대하여 큰 두려움을 갖기도 합니다. 이제 생명체란 고작 과학기술의 배합의 결과뿐인가 라는 의구심과 함께 미지의 미래에 대하여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녀의 사랑은 무엇이며 생명의 참 가치는 무엇인가 라는 심각한 물음 앞에서 더욱 고민하게 됩니다. 과학이란 어떠한 경우에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재앙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핵무기가 바로 그 구체적 예입니다. 핵분열의 원리는 에너지 생산이라는 긍정적 결과도 가져왔지만 핵무기의 경우에는 지구를 멸망시킬 정도로 무서운 파괴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은 유전자 조작, 생명복제 등 생명공학의 공헌을 예찬하면서도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재앙적 측면이 있으리라 염려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책임
이렇게 우리는 과학문명의 결실을 만끽하면서도 동시에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모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공해 문제에서 확인하듯이 이득이 있다면 거기에는 꼭 그 이득 때문에 치루어야 할 대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득과 치루어야 할 대가, 이 둘 사이의 조화는 바로 우리 인간에게 달려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인간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는 무엇을 위한 그리고 누구를 위한 과학문명인가 라는 아주 초보적이며 상식적 물음을 다시 제기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의 원리, 인간의 존엄, 공동체의 선익을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생명의 신비 앞에 도전하는 과학자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생명을 경외하고 과학과 생명이 함께 확인될 조화를 지향합니다.

인간활동의 가치(1)
(사목헌장 34항)


하느님의 모상이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
사람은 하느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창세기의 고백은 바로 인간의 기원과 목적이 하느님이라는 신앙의 기본내용을 설파한 내용입니다. 사실 누구를 닮았다는 것은 동체화(同體化)의 관계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같은 창조사업을 계승해야 합니다. 아니 사람의 존재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창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존재하되 늘 하느님과 같이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자신의 생명을 나누고 확산하는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오늘날 과학자들 특히 생명공학도들의 놀라운 연구는 인간이 지닌 창조능력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는 구체적 증거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성적 능력으로 최선을 다해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개발하고 창출해 냄은 바로 더욱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공부, 어른들의 노력, 신앙인의 신심업, 이 모든 것이 바로 창조사업의 일환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은 바로 이러한 이성적 능력 때문입니다. 자연 앞에 사람은 한낱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야생적 동물 앞에서 인간은 물리적으로는 상대가 안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 능력과 창조능력을 통해 우주 만물을 관장(管掌)하고 동물들을 지배합니다. 이 능력이 바로 하느님의 것이기에 우리는 늘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노동의 가치
인간은 필연적으로 노동을 통해 창조능력을 실현합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476년) 뒤 혼란에 빠진 로마를 제 궤도에 올려놓은 주인공은 베네딕도(480-547년) 성인이었습니다. 무질서와 혼란의 로마를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표어로 질서와 평화의 도시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향하는 인간의 마음과 자세이며 노동은 인간을 정화시키는 권위 있는 방법입니다. 노동은 인간존재의 필수적 요건입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성서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노동하는 존재입니다. 노동이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 가장 큰 벌은 무료함 곧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란 말도 있습니다. 노동하는 사람, 땀흘리는 인간이 참으로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은 늘 이웃과 더불어 함께 일합니다. 인간의 협력, 서로 돕고 사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성숙한 인간은 결코 하느님 앞에 교만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결실, 창조사업도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의 결과임을 겸허하게 고백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자유를 선물로 받은 인간은 자신의 행업에 대해 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주를 날고 정복하며 전자 통신으로 전세계를 1일 생활권으로 변모하는 인간의 능력, 그리고 이제 생명의 신비를 캐고 생명의 창조까지 도전하는 인간의 능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능력의 근원, 그 능력의 분배자 앞에 늘 머리 숙일 수 있는 겸허한 자세를 지니며 이 모든 인간의 능력의 발휘가 바로 하느님 능력에 기초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듯이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할 때에만 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인간활동의 가치순위(2)
(사목헌장 34항)

사람은 누구나 큰 꿈과 포부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윤리적 수행실천, 도덕적 가치 추구, 진리탐구, 학문연구, 기술과 과학 등 각 영역에서 이룩하고 있는 기적과 같은 결과가 이를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의 능력은 어떤 의미에서 무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능력을 토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자전적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인간은 그 어떠한 불가능도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동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저는 어느 날 요한14,12의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아니, 믿음의 힘이 아무리 크고 사람의 능력이 아무리 대단한들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다니!”하고 한참 생각했습니다. 사실 부모는 자신보다 더욱 능력있는 자녀를 기대하고 있음을 우리는 인생과정에서 늘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해 주신 이 말씀은 참으로 훌륭한 교육적 확신이라 생각합니다. 아니, 이것은 복음작가인 사도 요한의 신앙고백이며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확신을 토로한 선언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직접 선언이든 또는 사도 요한의 신앙고백이든 그 핵심은 바로 인간의 위대한 능력, 그 창조성에 대한 확인입니다.
사목헌장 35항이 바로 이러한 인간의 능력, 그 특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발전을 통한 세상의 변모된 모습과 특히 오늘날 전자통신시대에 하루가 멀다하며 진전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능력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자신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초월성이 바로 사람안에 내재된 하느님의 신적능력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란 정의구현과 인간애 실현
그러나 사목헌장은 여기서 인간능력의 참뜻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릭 프롬의 저서 곧 〈소유냐 존재냐?〉라는 물음과도 상통되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능력과 가치는 소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절대자 또는 이웃과 맺는 존재의 가치에서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목헌장은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바로 어떠한 인간이냐는 데에서 확인된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정의와 인간애가 우선하는 사회를 지향해야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마르코8,36)라는 성서말씀도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인간의 능력과 가치는 바로 정의구현과 인간애 실현에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기술발전과 정보통신의 발전은 바로 늘 이 정의와 인간애 관점에서만 그 참의미가 확인됩니다.
이와같이 정의와 인간애라는 규범은 바로 하느님의 규범입니다. 사람에게는 물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늘 도덕과 윤리의 범주에서만 그 참 가치가 확인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활동과 업적 그리고 세상의 발전과 진전도 늘 정의와 인간애가 전제된 조건에서만 그 참 가치가 확인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목헌장은 이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 뜻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야 함은 바로 인간이 중심이 되고 인간을 위한 헌신을 말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우리 인간이 살고있는 이 세상, 이 현실, 이 정치에 대해 더욱더 큰 관심을 갖고 이 세상현실을 얘기해야 합니다.

인류의 승리는 하느님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징표(3)
(사목헌장 34항)


사목헌장 34항은 인간활동의 가치라는 제목 하에 ①노력의 아름다움 ②가정사와 노동 ③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것 등 세 항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노력의 아름다움
우리는 약육강식이라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TV를 통해 동물의 세계를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자연계는 먹이사슬과 천적의 관계 속에서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삽니다. 그 대신 약한 동물들은 번식력도 강하고 몸집이 더욱 재빠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지혜를 갖고 이러한 동물들은 지배하며 먹고삽니다. 오늘과 같은 현실을 이루기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얼마나 노력했고 더구나 그 중 많은 이들은 자연의 재난과 동물들에 의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은 생명의 보존을 위해 자연을 극복하고 동물들을 정복하고 그리고 편안히 살 수 있는 삶의 자리를 이룩해 왔습니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노력과 싸움이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사회적 차원이든 개인적차원이든 노력과 싸움은 필수적입니다. 때문에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베네딕도의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표어는 5세기말 로마제국이 멸망되어 온 도시와 국가가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 거의 무정부 상태에 있을 때에 제시한 일종의 사회적 지침이었습니다. 부정과 부패의 뿌리도 캐어보면 결국 일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땀흘리지 않고 거저 먹겠다는 검은 마음의 표출일 뿐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노력하고 스스로 일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가정을 위해
어린시절부터 우리는 부지런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부지런 하라는 말은 곧 노력하고 일하라는 교훈이며 어린시절 뿐 아니라 나이 들어 삶을 다 할 때까지의 책무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매일 일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일상의 삶, 일상의 노동이 바로 하느님 앞에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가정은 우리 생명이 싹튼 현장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노력은 성실한 가사노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들의 수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사랑과 노력의 표상입니다. 그런데 동물도 모성적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동물적 본능을 넘어서야 합니다. 동물적 본능을 넘어선 노력은 바로 가정을 넘어 사회와 역사를 향한 노력과 봉사입니다. 때문에 노력과 봉사 그리고 우리의 노동은 가정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등을 넘어서야 합니다. 공동체와 역사를 생각하는 마음, 여기에서 참 노력과 노동의 가치가 확인됩니다. 오늘날 우리 현실의 일그러진 노동운동은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매달, 매해, 더욱 편하고 더욱 봉급만 많이 받겠다는 그 욕심과 이기심이 사회와 역사를 위한 대의(大義)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 나눔과 책임
우리는 탈란트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나름대로 능력과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유의 교훈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각자 능력은 다르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열개의 능력을 받은 사람은 열개의 결실을, 다섯 개를 받은 사람은 다섯 개를 그리고 하나를 받은 사람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를 더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얻은 결실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때문에 노력도 의무이지만 나눔도 또한 의무입니다. 그뿐아니라 여기에는 공동의 책임과 공동관리의 의무도 있습니다. 지구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갖고 있는 능력을 다 발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지구의 한계와 자연의 상황을 고려하여 조절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과학과 기계문명의 발달로 수공업시대의 최선과 기계문명의 최선은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눔의 의무와 결실은 함께 생각하여야 합니다.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8tu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