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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 35항-39항
   함세웅 신부   2004-06-28 15:21:53 , 조회 : 1,951 , 추천 : 292

인간활동의 가치순위
(사목헌장35항)

사람은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그 움직임에는 동물적 차원의 본능적 요소도 있지만 거기에는 동시에 정신적 창조적 결실도 있습니다. 이와같이 인간은 그 자체로 신비입니다. 사실 인간학의 핵심적 주제는 인간의 양면적 요소 곧 육체와 정신, 그 비참성과 위대성입니다. 그런데 문학인들은 인간의 이 양면성을 신성(神聖)과 야수성의 결합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문제는 인간은 결코 하느님이나 천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동물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신성과 야수성을 함께 지닌 참으로 독자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그 삶과 과정 등 모든 활동에는 이 양면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리스 철학에 기초한 이원론의 방법으로 인간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래도 늘 전인적(全人的)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 활동의 주체는 분명히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활동이 동시에 인간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활동에 따라 주체자인 인간의 품위와 가치가 확인됩니다. 활동은 분명히 인간의 산물인데 사람은 그 활동에 의해 특정된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묘한 순환논리입니다. 이것은 인간과 활동의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물리화학의 원리에서 물이 때로는 얼고 때로는 수증기기 되는 순환을 한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물이란 본질은 같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그 물의 형태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도 이와같이 그 행동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 그 활동과 행동을 보고 판단합니다. 인간 활동은 사람의 자기표현과 함께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방법입니다. 인간의 활동은 세상을 변혁합니다. 여기에는 과학문명을 통한 창조적 변혁도 있고 전쟁 등을 통한 파괴적 변혁도 있습니다. 그뿐아니라 인간은 때론 초능력과 같은 힘을 발휘하며 자신을 능가하기도 합니다. 순교와 투신예술적 삶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반면 전쟁, 살인 등 무리한 행동은 파멸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활동의 주체인 인간이 활동에 종속되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현실과 종교, 과학과 신앙, 세상과 하느님
(사목헌장 36항)


1. 한달 전에 저는 교육방송(EBS) 주부특강에 초청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2001.12.31 한해를 마무리하는 내용과 2002.1.1 평화를 기원하는 새해의 자세 등으로 강의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일 생방송이라면 생동감이 있을 것 같은데 한달 전쯤에 미리 녹화를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강의 내용은 일자와 무관하지만 주고받는 인사는 12월31일과 1월 1일을 가정하고 나누게 되니 좀 어색할 뿐아니라 이것은 하나의 연극이며 비록 선의이기는 해도 고급 거짓말이기에 사제신분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PD 등의 설명에 설득되어 어쨌든 녹화를 하기로 했습니다. 첫 강의가 끝나자 담당 PD와 작가가 몇 가지 주의를 주었습니다. 기도라는 용어가 종교적  냄새가 풍긴다는 것과 강의 내용이 좀 어려우니 쉽게 풀어서 가능하면 예화 등을 통해 평안하게 웃으면서 들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째 강의는 그 요구에 응하면서 했지만 그 또한 저에게는 부자연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세상현실이고 이것이 방송 실체의 한 면임을 배웠습니다. 그날 스튜디오에는 30여명의 자원 청강 주부들이 함께 했고 인위적 만남이었지만 이들은 강사인 저를 통해 넓게는 종교와 삶, 좁게는 가톨릭 교회와 사제의 모습을 체험한 셈입니다.
2. 저는 물론 종교적 냄새를 풍기지 않도록 하라는 PD의 요청을 잘 알아들었습니다. 제딴에는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제3자의 처지에서는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실 종교적 삶은 말로보다는 그야말로 삶을 통해 나타내야 합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모든 것을 종교적 언어로 얘기하고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때로는 많은 이들에게 거부감을 줄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며 이웃에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모범적이며 솔선수범이고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가하며 스스로 느끼고 감탄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균형 잃은 믿음, 지나친 믿음을 흔히 광신(狂信)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참으로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도 미칠 수가 있습니다. 믿음뿐입니까? 정신도, 사물도, 자연도, 동물도 미칠 수가 있습니다. 균형과 조화를 잃고 정도를 벗어나면 그것이 곧 미쳐가는 첫 과정입니다. 암(癌)이란 것도 사실 일반적으로 설명하면 세포가 미친 것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균형, 조화, 상식이 바로 진리의 바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사목헌장 36항은 바로 현실과 종교 또는 과학과 신앙 또는 세상과 하느님이라는 주제에서 이 둘이 갖는 상관 관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균형과 조화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주관자이시지만 현실과 과학 그리고 이 세상과 자연은 나름대로의 독자적 원리 속에서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자적 자율성이 결코 신앙과 종교 또는 하느님을 배제하거나 외면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현실과 종교, 과학과 신앙, 또는 세상사물과 하느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조화를 꾀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다르고 ‘아’다르다는 우리의 표현이 있습니다. 다함께 세상사물과 과학 현실을 논하더라도 그 어떤 내적 자세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세상사물을 조화있게 바라보는 균형 있는 시각과 믿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현실과 종교, 과학과 신앙, 세상과 하느님(2)
(사목헌장 36항)

인간의 자율성, 사회와 학문의 자율성
인간의 참 가치는 정신적 자세를 통해 확인됩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과 같이 구체적 현실에서는 먹는 것이 우선하고 때로는 더욱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육체적 현실이 정신세계보다 앞선다는 뜻도 됩니다. 그렇다고 육체적 삶이 정신세계를 능가한다든지 또는 정신세계와 무관하게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는 다만 기능적 역할을 할 뿐 실제로 그 육체를 좌우하는 내적 힘은 정신 또는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과거 2분법적 구조 속에서 펼쳤던 논리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육체와 영혼이라는 단순한 2분법적 설명보다는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사람을 전인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육체적 현실의 독자적 영역이 있지만 그래도 이것은 늘 정신세계와 연계되어 있으며 반대로 인간의 정신세계도 나름대로 그 독자적 영역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늘 육체적 현실을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글쎄 이러한 구별과 구분은 실제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물의 구분처럼 분명히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이론과 관념을 통해 이루어진 구분입니다.
자율성의 의미와 한계
어쨌든 우리 인간은 현실과 세상 안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많은 결과를 이룩하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세상을 진지하게 고찰하면 우리는 참으로 너무도 놀랍고 신기한 일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인간의 능력 바로 그 결과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인간 자신이 하느님의 피조물이기에 이 모든 결실은 결국 하느님의 것이라는 해석이 자연스럽게 가능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신앙인의 필연적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제기되는데 결국 인간은 하느님의 로봇에 불과하다는 것이냐는 물음입니다. 사실 중세교회는 황제임명뿐 아니라 세상과 사회, 학문 등 모든 것을 주관하고 규제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을 전후로 유럽전역에서 새롭게 싹튼 문화운동 곧 르네상스, 계몽주의, 프랑스혁명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교회의 역할은 축소되고 그 대신 과학의 역할이 극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공산주의 출현과 과학기술 그리고 정신분석학 등의 진전으로 교회의 영역은 위축되고 나아가 무신론의 극찬과 인간만능주의가 우선하면서 교회는 물론 하느님까지도 적극적․체계적으로 거부하는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세상과 과학만능의 시대가 되고 교회는 오히려 퇴색된 셈입니다.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고 하느님을 거부하면서 인간은 절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과 같이 사실 이것은 바로 과거 중세교회가 저지른 종교적 오만과 우를 이제는 인간중심의 과학만능이 반복하여 저지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은 상호보완의 관계 있음을 깨닫고 행해야 합니다.
신앙과 과학기술의 상호보완관계
오늘날 교회공동체는 인간의 자율성을 높이 칭송합니다. 개인과 사회, 과학과 기술영역에서 인간이 지닌 자율성, 세상이 지닌 나름대로의 원리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인간다워야 한다는 윤리와 도덕성 위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조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확인하고 인정할 때에 그 참 가치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한 지향과는 달리 의도적으로 하느님과 신앙을 배제하며 인간의 자유 또는 학문의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의 참 가치를 호도하고 신앙을 왜곡시키는 현상에 대해 교회공동체는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 항목에서 사목헌장이 강조하는 핵심은 훌륭한 신앙인이 현실사회 안에서 모범적 시민, 도덕적 지성인, 창조적 과학자, 각 분야에서의 전문인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국가를 위한답시고, 과학과 전문분야에 투신한답시고 하느님을 떠나가거나 신앙을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모름지기 현실사회에서 그리고 자기가 속한 영역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범인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죄와 그 비참한 결과
(사목헌장 37항)

우리는 과학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그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도 매우 큽니다. 환경오염, 자연파괴 등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그뿐 아니라 재물축적을 우선으로 하는 이 자본주의 문화권 속에서 모두 공감하고 지적하는 것은 철저한 개인주의와 ‘돈’ 중심의 이기욕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고질병인 학연, 지연, 혈연 등 이른바 지역주의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권력만을 쫓는 해바라기성 또는 철새정치인 등이 바로 그러한 유형에 속합니다. 이것은 바로 가치관의 부재에서 비롯됩니다.
민족의식과 노예근성
사실 우리는 분명한 민족의식과 공동체의 정신을 지녀야 합니다. 민족의식이란 공동체의 기본정신, 윤리질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기에 그 후유증은 반세기가 넘도록 심각합니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을 토론을 통해 일치로 이끄는 제도인데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간과한 채 막연히 군부독재시대의 통제된 질서를 꿈꾸기도 합니다. 이른바 박정희 신드룸이 바로 그것입니다. 에집트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갈대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향하던 히브리인들은 사막의 여정에서 때로는 배고프고 때로는 갈증 속에서 심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에 이들은 모세에게 ‘우리가 죽을곳이 없어 이곳 사막을 우리를 데리고 왔느냐? 에집트 땅에는 먹을 음식과 마실 국이 있지 않았느냐?’ 하며 대들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히브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모두 그와 같은 노예근성을 지니고 있는 장본인들입니다. 이 노예근성을 뿌리뽑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노예일 수밖에 없습니다. 노예근성이란 바로 죄성 입니다. 노예근성에는 인간의 자존심도 더구나 윤리도덕과 분명한 가치관도 없습니다. 먹고사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유인에게는 인간의 존엄이 있습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자비와 사랑이 있습니다. 연대와 결속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살신성인의 자세로 늘 아름다운 미래공동체를 꿈꾸며 자신을 투신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향한 여정입니다. 그것은 또한 바로 선악투쟁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아니, 개인의 삶도 바로 이기심과 본능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사랑과 희생, 헌신을 통한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입니다. 이 사목헌장 자체도 바로 신앙인들의 피눈물나는 투쟁의 결실입니다. 무조건 옛것을 고수하고 교회의 영역을 성당 안의 건물과 종교예식만으로 제한하려는 수구적 안주세력과 성당건물 밖을 향해 세상 한복판 그리고 우리 일상의 모든 삶이 바로 교회의 영역이며 하느님 백성의 자리임을 깨닫고 강조한 진취적 신앙인들 사이에 펼쳐진 공방과 논쟁 속에서 얻어진 산물이 바로 이 사목헌장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하느님과 세상, 교회와 현실, 신앙인과 가정, 교회와 정치 그리고 문화, 경제, 윤리, 세계평화 등 모든 문제를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인간과는 무관할 수 없고 인간과 관계된 모든 것은 바로 하느님과 연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앙은 모든 면에 있어서 더욱 노력하고 어둠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뭔가 아름다운 열매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절제의 미덕
어쨌든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참으로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함께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유의해야 할 점은 풍요로운 삶이 흔히 인간의 자세를 흩트리며 재물과 현실에 예속시킨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풍요로움 속에서도 우리는 늘 검소하게 사는 자세, 무엇보다도 절제의 덕을 지녀야 합니다. 무절제한 풍요로움은 바로 인간 자신을 파멸케 하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강조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결코 이 세상에 종속된 존재는 아닙니다. 우리는 늘 세상을 능가하고 세상의 풍요를 절제하며 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풍요로운 삶과 화려한 환경 속에서 오히려 인간이 비인간화되고 인간의 참 가치가 상실되며 동물적, 본능적 삶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절제를 다짐합니다. 극기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삶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본능과 방종의 노예가 된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해결키 위해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원리를 되새겨야 합니다. 자만, 교만, 무질서, 이기심 등 모든 탈선의 요소를 극복하여 정도(正道)를 걸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의를 통해서만 부활에 이르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바로 끊임없는 노력, 단련, 수련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인들도 모름지기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며 자기완성과 구원을 이룩해야 합니다.
이 피눈물나는 노력을 사목헌장은 청빈과 자유의 정신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개구리가 올챙이때의 생각을 않는다는 경고와 같이 우리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 어렸을 때의 첫 꿈 등 그때의 마음가짐으로 이 풍요로운 삶 속에서 절제와 극기,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와 분열, 무질서를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빠스카 신비 안에서 완성된 인간활동
(사목헌장 38항)

강생은 그리스도의 핵심적 요소입니다. 인간의 세계로 오시고 인간과 함께 동고동락의 삶을 사신 하느님,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그 큰 은혜를 잊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늘 숨쉬며 공기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공기의 고마움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숨쉬는 사람은 호흡과 함께 공기와 하나가 됩니다. 이러한 합일은 호흡을 의식하는 사람에게만 인지됩니다. 강생의 신비를 우리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통해 실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의사가 환자의 집을 방문하여 환자와 함께 한평생 지낸다면 환자에게는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사실 의사는 환자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분입니다. 의사로서의 전문성과 기득권도 포기한 채 오직 환자의 벗이 되어 환자를 돌본 그 자체가 치유입니다. 그런데 그 의사가 환자를 치유하고 만일 자신이 먼저 죽었다면 그 환자에게 의사는 어떠한 존재이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인류에게 그런 분이십니다. 사람은 전쟁, 불목, 불화 부정, 불의 등 죄라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 죄라는 병을 치유키 위해 예수께서는 친히 우리 죄인 중 한분이 되셨고 결국 회개와 정의, 사랑과 자비라는 묘약을 통해 이 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사랑이란 인류가 안고 있는 개인적 또는 사회적 질병을 모두 치유할 수 있는 묘약입니다. 이웃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란 바로 계명을 지키며 윤리 도덕적으로 살아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엇보다도 모든 이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지니도록 강조하면서 참된 형제자매애가 바로 완성의 척도임도 일깨워주셨습니다. 사랑이란 태양과 같이 자연계를 골고루 비추는 보편적 자세이며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이 그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골고루 베푸신 것임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완성을 위한 필연적 과정은 십자가의 길임을 역설하시면서 그분 친히 먼저 그 길을 통해 영광과 부활을 실현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평화의 선물을 주시며 무엇보다도 희망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승천과 성령강림이 바로 이 희망과 평화의 보증입니다.
현실적 삶의 성사적 의미 - 성령과 성체
사실 인간의 여정은 만남과 재회의 연속입니다. 갓난아기가 부모 품을 떠나지 않으려고 두 손을 움켜쥐는 본능적 행동에서부터 유치원 또는 학교에 가야 할 5-6세의 나이에 불과 몇 시간도 부모와 가정을 떠나기가 두려워 애태우는 마음, 입대전 청년의 불안하고 착잡한 마음, 또는 시집갈 신부의 두려움과 아쉬움, 그리고 끝내는 세상을 떠나야 하는 죽음의 이별, 그 아픔 속에서 사람은 그 어떤 희망을 간직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 기도를 올리셨으며 가능하면 그 고난의 잔을 치워주십사 하느님께 간구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여인들은 예수님을 잃고 매우 슬퍼하며 거의 절망에 가까운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부활의 체험과 함께 이 모든 슬픔을 극복했습니다. 발현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빵도 드시고 물고기도 구워 잡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예수님을 알아 뵙는 순간 예수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아니, 예수께서는 결정적으로 하늘에 오르시어 사도들과 영영 이별하신 것입니다.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사도들에게 하늘의 천사들은 “갈릴레아 사람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앞에서 승천하신 예수님은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시리라”는 말씀으로 희망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승천은 바로 재회의 약속이자 보증입니다. 이에 사도들은 오직 희망을 갖고 희망 속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확인하며 용기 있게 살아야 합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은총은 바로 사람의 수만큼 많고 다양합니다. 아니, 성령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은 생명의 모습, 그 다양한 능력의 표출입니다. 성령의 은혜와 그 다양성은 바로 우리 교회공동체와 인류공동체의 아름다움을 확인해 주는 하느님의 보증입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며 이 모든 은총은 바로 공동선 곧 공익을 위한 것입니다. 공동선이란 바로 우리 모두 각자의 처지에서 해방되어 전인적 인간이 되어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강생의 신비는 이제 성체의 신비를 통해 장엄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음식을 먹어야 삽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로 우리의 빵과 음료가 되시어 오십니다. 빵과 포도주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먹이가 되신 예수님의 사랑의 극치를 체험하며 우리는 모두 친교를 확인합니다. 강생이란 바로 물 흐르듯 스스로 낮추어 흐를 때 생명을 주는 사랑의 운동입니다.

새 땅, 새 하늘
(사목헌장 39항)

우리는 죽음을 넘어 영생의 희망을 갖고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나뭇잎이 떨어진 겨울철에 우리는 새싹이 돋을 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온갖 굴종과 억압 속에서 자유와 해방을 기다리며 시대적 봄을 노래한 옛 선열들의 마음 속에서 우리는 희망과
꿈을 뜨겁게  확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 결코 허무가 아니고 영생으로 다가가는 한 과정으로 이해하면서 늘 희망을 간직해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성모승천, 순교자들의 결단 그리고 선열들의 헌신적 희생이 바로 이러한 희망을 더욱 분명히 확인 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내일을 모르고 세상종말도 더구나 우주의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우리 인간이 바로 이 우주만물의 중심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사랑하고 구원하시리라는 분명한 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우구스띠누스의 고백처럼 우리에게는 무한한 꿈과 영원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 안에 내재된 이 무한한 갈망이 바로 하느님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의 확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면 영생과 구원이 보장된다는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실망과 좌절을 넘어 그 어떠한 경우에도 꿈과 희망을 간직해야 합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새 하늘 새 땅을 꿈꾸며
그래도 우리는 두발을 땅에 디디고 사는 현실의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다리구실을 합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하늘나라를 고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고대하고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노력함은 바로 이 세상, 이 땅도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함께 성화되고 또한 승화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갈망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지상적 책무를 더욱 일깨워 줍니다. 하늘나라의 열정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더욱 밝게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더욱 분투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모범이 되어야 함은 세상의 개선과 발전을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세상과 하늘나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1세기 말엽 모진 박해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실망과 좌절 속에서 자포자기한 채 신앙을 저버리며 현실에 매몰되어 결과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외면했습니다. 불의한 권세와 악마적 황제가 판을 치는 그 어두운 상황에서 원로사제 요한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묵시록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을 지녀야 한다는 확신과 함께 이 세상 권세는 잠시일 뿐 이 로마제국도 먼 옛날 바빌론이 멸망했듯이 꼭 멸망되리라 선언하며 이 모든 박해를 이겨내고 신앙에 항구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는 또한 결국 인생의 삶과 부귀영화 그리고 국가권력과 통치로 한낱 안개와 같은 것으로 곧 사라지고 말 것이며 사랑과 자비, 선행과 증언적 삶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선언하고 했습니다.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을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유와 친교 속에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며 하느님께서 이룩해주실 새로운 나라를 기다림은 신앙인의 책무요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새 하늘, 새 땅의 주역들입니다. 아니 새 하늘, 새 땅을 바로 지금 이곳 현실에서 늘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뜻과 섭리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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