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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 40항-41항
   함세웅 신부   2004-06-28 15:38:35 , 조회 : 1,937 , 추천 : 320

교회와 세계의 상호관계
(사목헌장40항)

인간의 양면성, 교회의 양면성, 성과 속의 합일
사목헌장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 참으로 인간적 사안은 모두 교회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교회는 결코 건물 속의 모임이나 믿는 이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 할 가치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목헌장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참 정의(定義)와 존엄성을 강조하고 인간이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성과 이를 기초로 우주 안에 중심이 되는 그 내적 가치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올바를 신관, 올바른 교회관을 지녀야 합니다. 사실 사람은 현실과 내세, 육과 영, 몸과 마음 등 양면의 합일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도 필연적으로 이 두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하는 구원의 성사인 교회공동체는 구원의 신비를 체험케하는 현장으로 동시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이 신비체는 동시에 역사적 관점에서 천지창조이래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는 하느님의 백성이기도 합니다. 그 누구든 어느 민족이든 이 하느님 백성의 범주에는 직접 간접으로 관련되어 있고 이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 구원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양면성 또는 이중적 요소란 때로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역설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교회공동체는 하느님께 기원을 둔 신적 요소와 함께 사람으로 구성된 인간적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이 양면성은 곧 그 불가시적-가시적, 신비적- 법적, 내면적-외면적, 초월적- 내재적, 천상적-지상적, 성인들의 모임-죄인들의 모임, 은총과 제도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고 더구나 교부들이 고백한 바와 같이 교회공동체는 거룩한 죄녀(casta peccatrix, casta meretrix)라는 모순적 별칭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성(聖)과 속(俗)은 공존의 가치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현실, 교회와 세상의 관계가 바로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 기도하는 집, 성당을 지을 때 사용되는 그 모든 자료는 바로 이 세상의 것, 우리일상의 집과 똑같은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교회공동체 내의 질서를 위한 이른바 통치구조나 정치사회 현실에서의 통치구조도 그 기본골격은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 속에서 속성(俗性)을 보고 또 정치 사회현실 속에서는 성성(聖性)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단계, 도통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과 교회는 마치 영육 합일의 불가분의 관계
현실에 뿌리를 둔 교회는 그러나 이 현실이 교회의 목적이 아니라 한 단계와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늘 현실을 넘어 초월의 세계로 움직입니다. 그 움직임이 바로 종말론적 삶입니다. 그리고 이곳 현실을 나그네 여정이라 이해하면서 보다 크고 완전한 목적지 곧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희망입니다. 분명히 교회는 역사 안에서 역사와 함께 이 세계와 운명을 같이 하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이 관계는 마치 영혼과 육체의 관계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다선민만이 지녔던 우월 사상을 깨고 이방인들도 거룩하다는 보편적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바로 교회가 거룩한 것이 하느님 때문이라면 이 세상 우주만물 또한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존재론적으로 성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사목헌장은 밀가루와 누룩, 육체와 영혼의 관계로 은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신앙을 통해 이해가 가능한 역사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흔히 우리는 교회를 지상국가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때의 지상국가는 지상교회 뿐아니라 사람으로 구성된 모든 사회, 정치, 국가공동체를 다 함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 온 세계 모든 국가가 하느님 안에 구원되기 바라며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이를 위한 교회도 같은 행업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교회라는 범주를 보다 넓게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죄와 허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일그러진 시각과 부족한 판단으로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처음에 선포하신 내용은 회개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죄를 개선하고 이를 기초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도록 강조하셨습니다. 이 회개를 통해서 인간은 구원의 빛을 감지하고 구원의 빛을 반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늘 사회를 구성하며 공동체 안에서 이웃과 관계를 맺게 되어있습니다. 이에 서로 가치를 존중하고 목적을 확인하며 일치의 결속을 강화하고 일상생활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빛을 밝혀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열악한 노동조건, 정치 사회적 제한 속에서 우리 모두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며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쟁함은 바로 이 구원의 빛에 대한 갈구입니다. 인간다운 세상이 바로 하느님다운 것입니다. 몰트만이 옳게 지적했듯이 오늘날 신학은 모름지기 인간학이어야 한다는 것도 바로 이를 뜻합니다. 가장 인간다운 삶이 하느님다운 삶이고 가장 인간다운 것이 하느님답습니다. 따라서 참으로 인간다운 삶과 인간의 진정한 관계 속에서만 하느님과 신학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과 실천은 가톨릭신자뿐 아니라 같은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개신교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요청되는 것으로 우리가 같은 그리스도인인 이상,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인간인 이상 서로 돕고 협력해야 합니다. 이웃과의 협력과 협동이 바로 가장 권위 있는 그리스도인의 행업 입니다. 사실 교회공동체는 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따라서 연대성과 상호성, 곧 관계를 맺고 서로 확인해 주는 가치가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교회가 개인에게 주고자 하는 원조
(사목헌장 41항)

사람은 소 우주이고 사회의 주체이며 중심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작게는 개인적 욕심과 본능적 원욕 때문에 생기는 갈등과 병고와 사고 등 죽음을 당하면서 느끼게 되는 한계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가족에게서 이웃에게서 그리고 무엇보다 공동체의 삶이 성서의 진리 안에서 받는 위로와 동기 삶의 지표는 큰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특히 성서와 교회는 인간존재의 근거와 의의 그리고 그 목적을 분명하게 선언하면서 참으로 가치있고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는 사랑하시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에로 초대하시고 이끄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우리 인간 각자는 바로 이 우주만물의 중심이며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대화자 동반자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가 친분을 갖고 있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우리는 큰 긍지를 갖게 됩니다. 권력 지향적 사람은 대통령, 장관 등과의 인맥을 형성하려하고 재벌을 꿈꾸는 사람은 재벌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며 누구든지 사회 명망가들과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그리고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우리는 교황, 추기경, 교황대사 등과 또는 주교 그리고 본당공동체 안에서는 본당신부, 수도자들도 그 무리에 듭니다. 그러나 성서와 교회는 이를 기초로 우리가 하느님과 친분을 맺고 있다면 그 무슨 꿈이 더 필요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 바오로의 설명을 되새겨 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편이 되셨는데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참으로 경지에 이른 분의 선언이며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늘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현실적 일에 일치적 관심을 두고 있지만 성서와 교회는 이것을 넘어 절대자 하느님과의 올바른 가치를 외치고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염원을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은 아우구스띠누스의 신앙체험과 사랑의 고백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고백록) 바로 이러한 깨달음이 종교의 시발이며 근거입니다.
사실 인간은 그 자체는 종교적 존재입니다. 인간의 출생, 결혼, 죽음 등 가장 중요한 이 세 사건에 대한 각 민족문화의 예식은 그 자체가 종교심의 발로입니다. 자녀의 출생을 기뻐하는 부모들의 마음, 결혼식에서 축복의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의 마음, 장례식에서 경건하게 명복을 비는 사람들의 마음 이것이 바로 종교심의 표출 아니 종교의 한 형태라 생각합니다. 이모든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이 기원과 현실, ??적을 생각하며 보다 진지하게 접근합니다. 성서와 교회는 이러한 일반적 체험을 심화시켜 체계화하며 보다 분명하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정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공동체는 이러한 인간의 신비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깨달은 사람들의 모임이며 이 종교적 체험을 삶의 근거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인생은 그 자체가 수수께끼입니다. 이 수수께끼를 성서는 하느님의 계시 안에서 찾으며 그 결정적 해방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얻고 있습니다. 인생의 기원, 욕심, ??분열, 죽음, 회개, 화해와 일치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 등 그 표본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자아실현, 자기완성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삶, 그 가르침과 사상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자신의 존엄을 확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표본으로 삼은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정신적, 심리적 , 정치적, 사회적으로 균형감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분은 그 어떠한 종교적 규범보다도 인간의 가치와 삶을 우선시 하였고 특히 안식일 규정과 정결례법의 핵심도 바로 인간의 존엄 확인에 있다고 설파하셨습니다. 종교의 ??복행업 중의 하나 단식과 절제도 때로는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면서 음식과 술을 나누심으로 참으로 여유 있는 자연적 삶을 지향하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먹보, 술보다라는 누명도 받았습니다. 예수는 이와 같이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너무도 인간적인 분이셨습니다. 주어진 현실에서 이웃과 함께 인생을 산 분입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현실론자는 아닙니다. 때로는 무섭게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본능을 떨쳐버리고 철저하게 하늘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며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에게 휴식과 평안을 약속하는 인간적 주인공이십니다. 따라서 공의회는 교회의 사명이 바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보장하는 공동체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역사는 자유를 실현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죄는 바로 인간을 잘못된 가치에 예속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의 욕심, 무엇보다도 죄와의 단절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킵니다. 성서와 교회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양심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자유의사와 자유결정을 존중하고 이를 기초로 한 사랑과 자??를 칭송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가르침, 복음서 원리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마태오 25,41이하의 최후의 심판에 언급된 구원의 기준은 바로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뿌리는 하느님이며 그 주체 또한 하느님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삶을 재현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역사와 개인의 주인이십니다. 성서와 교회는 늘 이러한 사랑에 기초한 개인을 존중하고 그 완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애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성서와 교회 그리고 하느님과 무관하게 인간의 힘만으로만 가능하다는 이른바 무신론적 박애주의나 종교를 배제한 인본주의에 대해서는 염려하며 모든 자비와 사랑은 늘 하느님과 연계되어 있기에 그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께 대한 패쇄적 자세나 거부적 자세를 지니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사실 인간이 절대 장를 추구하지만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자유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어야 하는 한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만 자유롭듯이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과 품속에서만 참 삶을 살고 참된 자유를 느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바로 이웃사랑,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확인된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보장해야 할 교회의 사명
(사목헌장 41항)

인간 :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위대한 존재
인간학에서 우리는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이라는 양면성을 배웠고 우리는 이를 또한 일상생활을 통해 늘 확인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창조성과 초월성을 통해 아무리 큰 일을 이룬다 해도  동시에 우리는 병과 죽음을 통해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계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개인적 욕심과 본능적 원욕 때문에 생기는 갈등, 병고와 사고 등 죽음 앞에서의 한계, 여기서 인간은 꼭 가족, 이웃, 공동체, 특히 믿음과 성서 그리고 교회적 삶 등 제3자의 도움을 받게 마련입니다. 사실 성서와 교회는 인간존재의 근거와 의의 그리고 그 목적을 분명하게 선언하면서 참으로 가치있고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이 바로 이 우주만물의 중심이며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대화자 그리고 동반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친분을 맺고 있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나름대로 큰 긍지를 갖습니다. 권력 지향적 사람은 대통령, 장관 등과의 인맥을 형성하려하고 재벌을 꿈꾸는 사람은 재벌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등 누구든지 사회 명망가들과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물리적 배경은 좀 다르지만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우리는 같은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교황, 추기경, 교황대사 또는 주교 등과 맺는 친분의 힘과 상징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당공동체 안에서도 본당사제, 수도자들 또는 사목회장이나 신심단체 임원들도 나름대로의 영향력과 힘을 갖고있습니다. 사람과 맺는 관계가 이렇다면 하물며 하느님과 맺는 관계는 어떠하겠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 때문에 참으로 큰 긍지와 자신감을 지닌 대표적 성자(聖者)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편이 되셨는데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로마8,31) 참으로 경지에 이른 분의 선언이며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늘 눈에 보이는 현실적 일에 일차적 관심을 두고 있지만 성서는 가시적 현상을 넘어 절대자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또한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염원을 채워줄 수 있다고 말한 아우구스띠누스의 신앙과 사랑의 고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의 출발이며 깨달음 그리고 내면적 체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한 결정적 해답
사실 인간은 그 자체로 종교적 존재입니다. 인간의 출생, 결혼, 죽음 등 가장 중요한 이 세 사건에 대한 각 민족문화의 예식은 그 자체가 종교심의 발로입니다. 자녀의 출생을 기뻐하는 부모들의 마음, 신랑 신부의 축복을 빌어주는 하객들의 마음, 장례식에서는 고인의 명복을 비는 조문객들의 경건한 자세, 이것이 바로 깊은 종교심의 표출이며 나아가 종교의 효시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기원과 현실, 목적을 생각하며 보다 진지하게 접근합니다. 성서와 교회공동체는 이러한 일반적 체험을 심화시켜 체계화하며 보다 분명히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정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공동체는 이러한 인간의 신비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깨달은 사람들의 모임이며 이 종교적 체험을 삶의 근거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수수께끼입니다. 이 수수께끼를 신앙인은 하느님의 계시 안에서 해결하고 그 결정적 해답을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기원, 욕심, 죄, 분열, 죽음, 회개, 화해와 일치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 등 그 표본과 해결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자아실현, 자기완성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삶, 그 가르침과 사상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자신의 존엄을 확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표본으로 삼은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정신적, 심리적 , 정치적, 사회적으로 균형감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분은 그 어떠한 종교적 규범보다도 인간의 가치와 삶을 우선시 하였고 특히 안식일 규정과 정결례법의 핵심도 바로 인간의 존엄 확인에 있다고 설파하셨습니다. 종교의 기본 행업 중의 하나인 단식과 절제도 때로는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면서 음식과 술을 나누심으로 참으로 여유 있는 자연적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먹보, 술보다라는 누명도 받았습니다. 예수는 이와 같이 무엇보다도 너무도 인간적이며 너무도 자연스러운 분이셨습니다.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이웃과 함께 인생을 산 분입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현실론자는 아닙니다. 때로는 무섭게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본능을 떨쳐버리고 철저하게 하늘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며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에게 휴식과 평안을 약속하는 인간적 주인공이십니다. 따라서 공의회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보장함이 바로 교회공동체의 일차적 사명이며 임무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적이신 분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지나친 금욕주의자도 아니며 그렇다고 자유방임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분은 참으로 도덕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균형감각을 지닌 참으로 성숙한 인간상을 제시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
사실 인간의 역사는 자유를 실현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죄는 바로 인간을 잘못된 가치에 예속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이기심의 극복 곧 무엇보다도 죄와의 단절에서 가능합니다. 성서와 교회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양심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자유의사와 자유결정을 존중하고 이를 기초로 한 사랑과 자주성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가르침, 복음서 원리입니다. 사실 마태오25,31이하의 최후의 심판에 언급된 구원의 기준도 바로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뿌리는 하느님이며 그 주체 또한 하느님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삶을 재현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역사와 개개인의 주인이십니다. 성서와 교회는 늘 이러한 사랑에 기초한 개인을 존중하고 그 완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해야 할 인간의 책무
그러나 교회공동체는 인간애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하느님과 무관하게 인간의 힘만으로만 가능하다는 이른바 무신론적 박애주의나 하느님을 배제한 인본주의에 대해서는 분명히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 모든 자비와 사랑은 늘 하느님과 연계되어 있기에 그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께 대한 패쇄적 자세나 거부적 자세는 금물입니다. 어쨌든 절대자를 추구하고 있는 인간이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만 자유롭듯이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과 품속에서만 참 삶을 살고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웃사랑,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확인됩니다. 물론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광대무변한 하늘을 바라보며 무한으로 열려있는 가능성, 이웃을 위한 투신과 사랑 속에서 공감하며 감동을 느끼는 열정, 선행의 실천과 정의구현을 위한 내적 명령,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느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구체적 징표들입니다. 사랑을 통한 변혁의 힘, 그것이 바로 내 안에 계신 절대자의 흔적입니다. 성서와 교회는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 자신의 신원과 목적을 깨닫게 하는 길잡이이며 스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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