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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 43항
   함세웅 신부   2004-06-28 20:21:11 , 조회 : 1,909 , 추천 : 282

보다 진지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성탄절 단상(斷想)과 함께 드리는 인사와 기도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과 저희 사제들을 사랑해 주시는 모든 교우들께 감사한 마음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12월입니다. 곳곳에 네온싸인이 번쩍이고 화려한 전등과 불빛이 새삼 연말의 상혼과 소유욕을 부추기면서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실생활을 담아 전하는 TV 장면도 사실 뿌리를 캐보면 한낱 가상의 세계와 환상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김없이 재현되는 이 12월의 풍경도 어떻게 보면 TV화면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온갖 화려함과 기묘한 장식, 상상을 초월한 새로운 발상 등에 우리가 놀라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실생활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비현실적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내용은 12월25일 예수성탄과 직접 간접으로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당 안의 경건함이 그 외연을 넓혀 백화점과 상가까지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 긍정적면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종교의 자리, 예수님의 자리가 그만큼 넓어졌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세상의 상혼이 너무도 약싹발라 종교심까지도 상품화한다는 너무도 속보이는 어이없는 일이라고 비판도 받습니다. 어쨌든 엇갈린 이 두 견해를 나름대로 교차시켜 성탄의 참뜻을 현실 속에서 찾고 확인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 현실의 상거래 원리는 눈앞의 1회적 사건이기에 여기서 영속적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 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상거래에 담긴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방법을 창안해 내는 노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도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예수님의 뜻을 온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상인들의 노력과 정성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약싹빠른 청지기의 교훈이기도 합니다(루가16,1-12).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혼이 교회에 들어와 오히려 교회문화를 지배하고 교회자체도 이러한 상혼에 휘말려 이 상혼을 적당히 이용하려 하니 이것은 오히려 본질을 잃은 껍데기의 모습은 아닐까 하고 반성합니다.
따라서“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 한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 여기에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가16,13)는 이 성서 말씀의 분명한 교훈을 진지하게 되새겨야 합니다. 작은 고을 베들레헴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상혼에 휘말리고 있는 우리에게 경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탄은 하나의 고발이며 경고입니다. 편안하게 배불리 먹고사는 우리에게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루가6,21)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탄은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며 목적 없이 밀려가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 인생을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또한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온통 빈말과 거짓, 위선과 가식이 판을 치고 정치적 냉소의 현실에서 그래도 역사의 물줄기를 앞으로 끌어갈 수 있는 사람,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보다 긍정적이며 적극적 사고를 지닌 사람, 이러한 사람을 택해야 합니다. 따라서 지난 11월 21일 성모자헌 축일에 뜻 있는 이들이 오늘의 현실을 고민하며 발표한 선언을 전해 드립니다. 함께 읽고 참으로 진지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바로 이것이 오늘 다룰 사목헌장 43항의 가르침으로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사회 정치적 책무입니다.


오늘의 정국을 우려하는 지식인 선언

21세기의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좌우 할 대통령 선거가 눈앞에 다가온 오늘 우리는 이 나라 상황에 대하여 심한 우려를 금 할 수 가 없습니다.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민주화운동의 승리를 구가했고 93년에는 문민정부, 98년에는 국민의 정부를 이룩하였다고 하지만 거듭된 실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심한 회한과 좌절의식에 빠져있습니다. 그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 얻어드린 민주화운동의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었던가 하고 안타까워하며 한숨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중의 승리, 국민의 승리란 항상 권력을 누리는 세력에 의하여 찬탈되고 마는 것입니까? 그래서 개혁이나 혁명이란 언제나 실패를 기록했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 국민은 실망한 나머지 민주화나 개혁, 화해와 통일이라는 고귀한 가치에 대해서도 그것은 정치가들이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냉소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임을 누구에게 묻겠습니까? 희생의 나날은 끝났다고 하면서, 권력과 자기이익 중심주의로 치달린 정치권력만을 나무랄 것입니까? 또는 지난날에 누리던 특권을 잃어버렸다고 반동적인 흐름을 따르려는 세력을 탓하고만 있을 것입니까?
우리는 세계사에서, 특히 현대사에서 개혁을 내건 정치권력이 부패하거나 실패하였을 경우, 지난날의 억압과 수탈을 일삼던 부패하기 짝이 없었던 세력을 국민이 선거라는 과정을 통하여 다시 권좌에 오르게 하는 반동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가슴아프게 보아왔습니다. 도처에서 냉전근본주의자들과 극단적 세력이 되살아나고 있는 듯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반민주적 망령의 부활을 보는 것 같아 참담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서 서 있으며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21세기의 격동하는 동북아시아의 정국을 바라볼 때 더더욱 그러한 반동적 선택을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위기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살얼음 위를 걸어가듯 예지를 가지고 국민의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민주운동이 요구됩니다. 이 가혹한 국제경쟁의 시대에 우리가 이룩해 내야 할 개혁의 과제는 산적해 있습니다. 더 이상 국민의 불신을 조장할 뿐인 부패할 대로 부패한 정치세력에게 국정을 농단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눈앞에 나타난 대권후보들이 우리의 기대를 모으기에는 너무나 미흡한 것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시 민주주의 선거체제 하에 있어서는 그래도 좀 나은 사람, 최악의 경우에는 덜 나쁜 사람에게 표를 던지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일인정치의 시대는 종말을 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 속에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식견과 능력, 그리고 양심을 지닌 거대한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그들을 동반자로 하여 전체국민과 더불어 대화하면서 걸어갈 수 있는 지도력이 요구됩니다. 그들은 대권을 향하는 선거과정에서, 미사여구가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바르고 공명정대한 실천을 국민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 역사는 민주주의의 길에서 반민주주의의 역사로 되돌아 갈 수 없으며, 되돌아가서는 결코 안 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또한 남북의 화해와 협력으로 우리 민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한다는 길목에서 되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범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역사에 역행하려는 부질없는 반동은 불안과 혼란과 불행을 가져올 뿐입니다.
요즘 선거정국에서 원칙도, 최소한의 체면도 없이 철새처럼 몰려다니는 정치세력, 출세나 이권에 눈이 어두운 전천후 인간들의 모습에 심한 서글픔을 느낍니다. 추한 행동은 추한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지난날의 그러한 세력에 둘러싸인 부패한 권력에 대항해서 싸운 것을 뼈아프게 회상합니다. 이제 제2의 민주화운동이 요청되는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잔인한 권력이 고문과 투옥과 죽음으로 위협했고, 이에 대하여 대중매체조차도 침묵하거나 동조했던 지난날의 부패-권위주의의 어두운 하늘 아래서 민주화의 고독한 투쟁을 전개하던 나날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그간의 좌절을 떨쳐버리고 다시 그 정신과 그 운동을 계승할 것을 우리 자신과 우리 국민에게 호소하고자 합니다. 이제는 정직하고 성실하며 유능하고 민주적이며 개혁적인 세력을 총 집결하여 승리의 날을 꽃피게 해야 합니다. 성숙한 우리 국민의 판단은 반민주, 전쟁, 반 통일의 정치적 퇴행 대신, 민주, 화해, 통일의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무
(사목헌장43항)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마태오12,28). 우리는 모두 구원과 완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희망과 영생을 기리며 내세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내세란 막연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뭔가 내적 확신을 주신 신앙의 길잡이입니다. 그런데 내세란 일반적으로 천당, 천국 또는 하느님 나라와 같은 뜻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내세 중심적으로 신앙이 정착되면 내세는 이 세상 다음의 과정이기에 자동적으로 천당과 하느님 나라도 이 세상을 떠나야만 이룩할 수 있는 다음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바로 여기에 큰 함정이 있습니다. 내세라는 표현은 죽음 다음에 맞이하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시간적 개념의 뜻이 있지만 그 보다는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희망과 구원,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내세를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의미론적 그리고 가치론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시간만 흐르면 되는 자연적 시간의 미래(future)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미래는 선취적 미래로(advent) 그것은 미래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앞당겨 실현하는 것입니다. 대림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다리는 계절 그러나 이 기다림은 이미 실현된 미래의 확인으로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과거의 선조들의 삶을 재현하며 그분들이 역경을 디디고 넘어서서 메시아를 기다렸던 그러한 마음가짐을 재현하자는 것입니다. 곧 과거 기억을 통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자세정립입니다. 둘째는 구체적으로 2003년 올해 12월25일 예수성탄을 보다 뜻 있게 맞기 위한 현실적 실천과 다짐입니다. 셋째는 다시 오실 예수님 곧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그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확인하는 작업, 언젠가 우리를 찾아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을 생생하게 기다리는 종말론적 자세입니다. 이와 같이 대림이란 역사 안에, 이 세상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확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연계점이며 바로 이 현실이 과거, 현재, 미래의 공유점이며 또한 이 현실이 미래를 앞당겨 실현하는 구체적 현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을 긍정해야 합니다. 현실을 긍정함은 물질적 또는 부정적 의미의 이른바 세속에 대한 수긍이 아니라 이 현실에 기초하여 미래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님이 사셨던 그러한 자세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못된 생각, 관습, 잘못된 종교적 신심, 사회적 불평등을 타파하시면서 최선을 다하고 나눔, 평등, 공유를 선포하시고 특히 약하고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고 구조적으로 잘못된 것을 타파하신 그 실천을 배워야 합니다. 성당에서 지녔던 기도하는 마음을 지니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하늘나라의 시민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긍정함은 만일 정치가 썩었다면 그 정치현장에 뛰어들어 투철한 행동을 통해, 아니면 예언자적 비판을 통해 또는 연대적 결속을 통해 그 썩은 정치사회문화를 변혁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 그리고 누룩이 되는 삶입니다.
사실 정치인과 관료들 중에는 제법 많은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앙이 정치현장과 관료 현실에서는 아무러한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이름만의 신앙, 껍데기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과 같이 세상 속에 내려와 세상을 껴안고 사신 예수님의 삶, 그 십자가의 원리로 그 현실을 송두리째 변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혁명, 신앙의 쇄신, 그리고 세상의 변혁을 위한 사회적 투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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