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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44항-45항
   함세웅 신부   2004-06-28 20:22:27 , 조회 : 2,026 , 추천 : 269

세계로부터 교회가 받는 도움
(사목헌장 44항)

스리랑카의 신학자 알로이시우스 피어리스 신부는 그리스도의 기본정신을 다룬 〈전례와 영성 그리고 사회적 투신〉이라는 글에서 둘씩 짝을 지어 ①전례와 영성 ②전례와 사회적 투신 ③영성과 사회적 투신이란 결국 상통되는 가치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전례와 영성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례는 기도의 필수적 표현이며 방법입니다. 신앙인은 모름지기 기도하는 사람이며 이 신앙인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공동체이기에 교회는 그 어떤 외적 표지를 통해 하느님을 찬미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례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장엄하게 하느님을 공경하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장엄한 전례거행을 위하여서는 일정한 장소와 제단, 촛대 등 성물 등이 요구됩니다. 전례분위기가 좋으면 기도도 훨씬 잘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체험입니다.
전례적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영성을 지니게 됩니다.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어원적으로는 영(spirit)과 질(quality)의 합성어입니다. 말하자면 영혼의 질이 향상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영혼에도 양질과 저질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양질의 영혼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 노력이 바로 극기와 수덕실천 등의 삶입니다. 그런데 어원적으로 영질(靈質)이라는 이 단어가 한자 문화권에서는 영성(靈性)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성(性)이란 어떤 의미에서 질과 같은 뜻이지만 어감상 그래도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영성이라는 것은 영혼에도 성(性)의 구별이 있고 성품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동양문화권에서는 남녀의 성을 무시한 채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하고 있으니 이러한 문화풍토에서는 참된 영성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참된 영성이란 영의 질도 따져야 하겠지만 또한 동시에 남녀의 구별과 평등이라는 관점에서도 해석하고 종합해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참 영성이 확인됩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남녀노소 모두를 친구와 벗으로 부르시고 더구나 여성을 경시했던 2000여년전 당시의 편견을 깨고 여성들을 당신의 벗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평등한 제자직이라는 엄청난 혁명적 변화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영성을 신심의 정적 측면에서만 이해하는 고전적 형태는 극복되고 구체적 현실의 삶 안에서 영성의 가치를 확인해야 합니다. 영성이 결코 사제나 수도자 또는 신심가들의 독점물이 아니라 각자의 삶 안에 내재된 고유성의 확인과 특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때에 비로소 공동체의 기도인 전례와 삶 속에서의 영성이 참으로 한짝이 될 수 있습니다.
전례와 사회적 투신
다음은 전례와 사회적 투신과의 관계입니다. 전례란 하느님을 공경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동시에 세상과 이웃에 감동을 주고 세상을 변혁해야 합니다. 사실 사랑의 원리에서 확인하듯 벗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비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참된 전례는 바로 이웃을 위한 그리고 세상을 위한 투신적 삶이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내에서 성인으로 추대된 분들 뿐아니라 민족사와 세계사 안에서 참으로 이웃을 위해 투신하고 자신을 헌신한 모든 선열들이 바로 성인이며 순교자들입니다.
영성과 사회적 투신
영성도 한가지입니다. 영의 식별력, 영의 질적 향상, 영의 성질들은 바로 이웃과 맺는 올바른 관계에서만 확인되는 가치입니다. 사실 영성신학의 기초는 수직적 관점에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로하고 수평적 영역에서 이웃과 향제자매애를 확인하는 삶입니다. 사실 초기 교회의 삶을 살펴보면 사도교부시대의 영성은 순교이며 호교시대의 영성은 사회적 증언입니다. 그리고 박해전후의 공통적 덕목은 항상 이웃을 위한 자선과 헌신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성의 가치를 현대적 관점에서 우리는 사회적 투신이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전례와 영성에는 매우 친근한데 반하여 사회적 투신에는 큰 이질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로이시우스 피어리스는 지적하면서 참된 전례와 참된 영성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투신을 지향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갈바리아 언덕 예수의 십자가가 전례, 영성, 투신의 뿌리와 기초
사실 전례의 시원과 뿌리는 세상한복판 갈바리아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상 예수의 죽음입니다. 이 세상 한 복판에서의 처형사건이 바로 전례의 시초입니다. 영성도 그렇습니다. 그 근원은 바로 갈바리아 언덕의 십자가상 예수께서 흘리신 피와 물, 죽음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투신의 귀감과 원형도 바로 이 십자가의 예수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 마굿간에서의 탄생과 힘께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빼앗기신 예수님, 사람에게는 물론 하느님께 마저 버림받았을 정도로 철저하게 소외된 예수님, 이 예수님이 바로 사회적 투신의 모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격식을 갖추시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결코 교과서적 정식(定式)의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전례와 예수께서 실현하신 영성은 성전 안에서가 아니라 세상 한복판, 갈바리아 언덕의 처형현장이었습니다. 바로 이 갈바리아 언덕의 십자가, 이 자리가 전례와 영성, 그리고 사회적 투신의 시원이며 교회공동체가 탄생된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바로 교회의 출발점이며 시초입니다. 갈바리아 언덕도, 십자가 나무도, 예수의 손발을 찌른 쇠못도 모두 인간의 구원과 완성을 위한 아름다운 자료들이며 모든 것이 세상의 구성요소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와 구원은 세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한때 우리는 이러한 세상을 적대시하면서 세상 경시와 세상을 등지는 것을 영성의 첫 조건이라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세상과의 결별도 시도해야 하지만 세상과의 결별은 결별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결별을 통해 세상에 더욱 깊이 스며들어 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바꾸기 위한 일종의 전략입니다. 교회가 바로 세상의 누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뜻입니다. 그러나 누룩이 그 진가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누룩이 자리잡을 현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사목헌장 44항은 바로 이 세상의 가치, 그 역사와 문화과정을 통해 교회가 받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쨌든 수많은 결실들을 있는 그대로 겸허하게 인정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역사, 과학과 문화의 혜택을 입은 교회
사실 교회공동체 자체도 세상의 한 부분이며 역사와 과학 그리고 문화의 한 요소입니다. 교회는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 그리고 역사의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과학과 문화의 발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습니다. 교회공동체내의 모든 의식과 언어, 상징과 표현, 반성과 종합 등의 작업은 사실 모두 이 세상의 것들입니다. 그뿐아니라 그리스철학을 비롯한 중동지역의 여러 문화의 형태를 취하고 특히 로마제국의 법론과 제도 등 그 통치구조를 기초로 오늘의 교회공동체가 이룩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제는 교회가 각 문화나 지역의 실정에 알맞게 뿌리내리고 그 민족문화에 적응하여 토착화를 실현해야 합니다. 사실 토착화의 뿌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강생입니다. 세상을 찾아오신 하느님, 인간의 조건을 그대로 취하시어 어린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 이 강생의 신비가 교회의 기본 원리이며 토착화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삶 곧 복음의 빛으로 이세상의 현실과 사건을 식별하고 재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내용과 그릇을 구별하는 지혜를 지녀야 합니다. 내용이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에 대한 신앙고백의 본질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본질을 담은 그릇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한스큉 신부님은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했습니다. 패러다임이란 문화적 틀입니다. 그것은 곧 신앙의 본질을 그 삶 안에 가장 적합하게 나타낸 형식입니다. 이에 한스큉 신부님은 그의 저서〈그리스도교〉에서 2000여년의 삶을 여섯개의 패러다임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2000여 년의 그리스도교의 삶을 여섯 단계로 설정하여 생각한 것입니다. 우선 한스큉 신부님은 “패러다임이란 동시대 구성원들의 신념, 가치, 행동방식들의 총체적 위상”이라고한 토마스 쿤의 문화적 정의를 그대로 수렴하여 교회사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페러다임이란 말 그대로 하나의 틀, 모델, 형식입니다. 패러다임이란 시대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틀과 그릇은 시대에 따라 늘 변할 수 있고 또 마땅히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바로 이 시대적 틀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틀 안에는 복음이라는 영속적 신앙의 본질이 있습니다. 이 본질은 변치 않고 항상 지속되는 가치입니다. 패러다임이라는 가변적 틀과 복음의 본질이라는 불변적 가치관, 이 둘의 상관관계를 한스큉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여섯단계의 틀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원그리스도교-묵시문학적 틀  
② 고대교회-헬레니즘 틀  
③ 중세-로마가톨릭 틀  
④ 종교개혁-개신교 틀  
⑤ 근대-계몽주의 틀  
⑥ 현대-일치운동 틀(포스트모던) 등입니다.
한스큉 신부님은 현재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도 바로 이 여섯 개의 틀과 여섯단계 중의 하나라고 겸허하게 고백하면서 다른 다섯 개의 틀 속에 담긴 신앙의 본질을 읽을 수 있는 밝고 맑은 눈을 지닐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물안의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물 밖의 더 크고 넓은 세상을 인식하고 그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와 현실에 관심을 갖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아니, 이 세상이 바로 교회가 위치한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의 교회, 세상에 뿌리내리고 있는 교회임을 겸허하게 인정하며 세상의 가치를 긍정해야 합니다. 이때 비로소 교회는 더욱 하느님을 은총으로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시작이요 마침이신 그리스도(1)
(사목헌장 45항)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목적의식을 지니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을 이룩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사목헌장은 교회의 이러한 사명을 ‘구원의 보편적 성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사란 하나의 표지이며 상징입니다. 그것은 곧 길잡이이기도 합니다. 사실 온 세상 우주만물이 바로 하느님을 깨닫게 하는 길잡이입니다. 이 세상이 바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풀잎 끝에 맺혀진 이슬 한 방울 속에서 우주의 신비를 체득하는 시인의 맑은 눈을 지닌 사람은 바로 이 세상 우주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꿈을 지닌 사람입니다. 시인은 영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인은 하찮은 사물 속에서 광대무변한 우주의 신비를 직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러한 시인이어야 합니다. 때문에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의 모진 박해 속에서 묵시적 희망을 지녔고 초기 그리스도교인들도 이와 같이 네로와 도미씨아누스 등과 같은 잔인한 박해자들 앞에서 ‘새 하늘 새 땅’을 기다리는 큰 꿈을 지녔습니다. 이것이 바로 묵시적 희망이며 확신입니다.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산을 저 바다로 옮길 수 있는 능력, 진실한 믿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욱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성(요한14,12참조),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결단,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삶을 철저하게 바친 전적 봉헌, 이 모든 것이 로마제국의 붕괴를 가능케하며 ‘새 하늘 새 땅’이라는 이상적 꿈의 나라를 실현합니다. 박해시대에서 죽음을 앞두고 영원한 삶을 꿈꾸었던 초기교회의 그 선열들의 믿음과 확신이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마음 안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쓰레기와 같을 따름입니다.
이 역설의 고백이 바로 세상의 변혁과 세상을 위한 투신을 가능케 합니다.

완성이신 그리스도(2)
(사목헌장 45항)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는 시작이요 과정이며 완성이라는 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늘과 세상,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하늘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를 잇는 다리입니다. 아니 그리스도는 바로 하느님과 인간을 합일케 하는 근본이며 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중개자 그리고 하느님의 성사(聖事)라임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교훈을 깨달아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고 구원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생사고락 이 모든 과정을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느님 안에서 재해석하고 하느님 안에서 그 참 뜻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성서작가의 고백처럼 인생은 한낮 안개와 연기에 불과하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 버리는 한 포기의 풀과도 같습니다(시편90).
이렇게 허망한 인간존재 안에 영원한 가능성 그리고 무한한 힘이 내재 될 수 있는 이 엄청난 일이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이며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인간의 존재는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또한 돌 하나 흙 한줌 속에서도 무한을 감지할 수 있는 물리학의 연구도 사실 진지하게 생각하면 엄청난 신비입니다. 결국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언젠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의 신비는 늘 후손들을 통해 지속됩니다. 생명의 신비, 물질의 신비, 계승의 신비, 그 어느 것 하나도 진지하게 생각하면 모두가 새롭습니다. 참으로 온 우주, 역사와 자연 앞에 겸허히 자신의 기원을 생각하며 그리고 목적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이며 완성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을 떠나 어느 날 우리의 주검 앞에서 기도 바칠 우리의 자녀, 후손,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하느님 앞에 가장 진실한 삶을 다짐합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를 판단하시고 우리에게 응분의 상급을 주실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이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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