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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49항-50항
   함세웅 신부   2004-08-08 10:30:15 , 조회 : 1,820 , 추천 : 310

부부사랑, 절제를 통한 완성의 삶
(사목헌장49항)

함 세 웅

결혼은 인격적 사랑의 교환이며 봉헌 그리고 약속과 다짐입니다. 때문에 약혼 때부터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날 성(性) 개방시대에 남녀의 관계가 무분별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본능적 결합만 부각되고 있는 슬픈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혼인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과 함께 선현들의 고귀한 삶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결혼 전에 성에 대한 건강한 교육을 받고 약혼시기부터 성과 부부애에 대한 고귀함을 배워 익혀야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극기(克己)와 절제(節制) 또는 자제의 삶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옳고 그른 것, 합당하고 합당치 못한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등의 구별 곧 건강한 분별력이 요구됩니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익혀야 할 덕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절제의 미덕입니다. 음식도 맛있다고 과식하면 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식사의 방법과 종류도 많습니다. 유아시절에는 모유, 그리고 이유기를 거쳐 연한 음식부터 차차 굳은 음식을 먹습니다. 음식은 적당히 취해야 합니다. 술도 물론 한가지입니다. 오늘날 최고의 건강법은 규칙적이며 적당한 식사로 음식을 더 먹고 싶을 때 수저를 놓으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절식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에로스와 아가페
이 원리를 우리는 비슷하게(analogice) 성(性)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신체적으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심리적 변화를 동반합니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이성(異性)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갖게 됩니다. 처음에는 남녀학생들도 친구처럼 서로 좋아하고 지냅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느 순간 우정과는 다른 그 어떤 느낌을 갖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보통 이성애(異性愛)라 부릅니다. 그리고 농도가 짙으면 첫사랑이 됩니다. 그리스의 서구 철학적 구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남녀의 사랑을 그 삶의 깊이와 동기를 구분하여 에로스와 아가페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첫 단계는 에로스적 사랑입니다. 에로스적 사랑을 우리는 보통 본능적 사랑, 이기적 사랑, 자아 중심적 사랑이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날 심리학 전문가들은 에로스와 아가페를 그렇게 칼로 무 베듯이 딱 가를 수 없다고 합니다. 에로스적 사랑 안에는 아가페도 내재되어 있고 아가페적 사랑 안에도 에로스가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제의 원리입니다. 때를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남녀의 결합은 결혼이라는 가정과 사회적 규범을 따르고 역사와 문화가 공인할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때를 기다리고 때를 포착하는 것이 성숙한 인간의 자세입니다. 때를 어긴다는 것은 인격파괴의 첫 걸음입니다. 사랑의 두 번째 단계라고 표현할 아가페는 사실 사랑의 원형입니다. 조건 없는, 헌신적, 위타적,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삶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벗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랑, 공동체와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던지는 살신성인의 삶, 이 모든 것이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부부가 함께 지향하고 지니고 실천해야 할 사랑이 바로 이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혼인이란 바로 부부가 서로 오직 배우자를 위해서 살겠다는 약속과 선언이며 바로 배우자만이 자기존재의 근거와 목적 그리고 가정의 핵이라고 생각하며 생활하는 특수한 삶의 양식입니다. 가정이 거룩하고 사회와 교회공동체의 모체인 그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혼은 남녀 만남의 사회적 공인
저는 사목 현장에서 참으로 남녀노소 많은 이들을 만나며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의 어둡고 미숙했던 성 체험으로 상상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60억 인구 중 남녀비율은 각각 반 정도입니다. 그리고 철들지 않은 어린이들과 고령의 노인들을 제외한다면 40억 정도는 됩니다. 그렇다면 남녀 각각 20억의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 만나 사랑하고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교통법규를 생각해 봅시다. 그 중에는 주정차 금지, 정지선, 차선, 신호 준수, 차선거리 확보라는 기본적 규정들이 있습니다. 이 규정이 하찮아 보이지만 이 법규를 어길 경우 어떤 때에는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교통사고란 한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남녀의 만남과 결혼을 도로교통에 비유할 수 있다면 40억 남녀인구가 움직이면서 합법적으로 상통하면 안전합니다. 그것이 바로 결혼입니다. 그런데 이 합법적 과정 없이 통과했다면 회복 불가능한 정신적 불구자와 폐인이 되기도 합니다. 교통법규가 체험을 통해 규정되었듯이 이 결혼의 원칙도 오랜 삶을 통해 인류가 서로 합의한 문화적 결론입니다. 따라서 이 과정을 통해서만 사람은 성숙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본능이란 참으로 묘합니다. 그것은 식욕과 함께 인간이 지닌 기본욕구입니다. 그런데 식욕이란 배고플 때 먹으면 해결되고 배가 부르면 식욕도 멈춥니다. 그런데 본능 곧 성욕이란 그 욕구가 끝이 없습니다. 그 욕구는 오직 자제와 절제를 통해서만 성숙됩니다. 성욕이 발동한다고 방임하여 살면 그 욕구는 구렁텅이 같아서 한없이 매몰됩니다. 식욕은 먹으면 해소되지만 성욕은 자제를 통해서만 조절됩니다. 이 자연의 철칙을 따라야 합니다. 물론 성욕대로 사는 무절제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의 삶은 인격적 삶이 아니라 동물적 삶입니다. 아니, 동물보다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일정한 발정기에만 서로 교합합니다. 그런데 무절제한 사람의 경우는 참으로 본능의 노예인 셈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본능과 성욕은 오직 일정한 도덕율과 절제를 통해서만 그 아름다움이 확인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절제가 없는 본능과 성욕은 그야말로 개 돼지만도 못한 저질의 수준입니다. 본능을 따라 절제 없이 산 사람들의 비참한 말로가 바로 이를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는 다는 교통질서 구호를 우리는 남녀의 관계에 엄격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이 경우 남성과 여성의 심리적 체험과 결과가 아주 다릅니다. 남성의 경우, 그 수컷의 본성상 일차적이며 가시적 책임을 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 여성은 그 흔적이 남고 더구나 임신한 경우에는 자녀를 출산해야 합니다. 최근에는 구성애씨 등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아름다운 우리의 성’이라는(아우성)재단을 설립하여 건전한 성교육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이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과 다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훌륭한 길잡이입니다. 이 점을 젊은이들이 분명히 인식하도록 부모들이 깨우쳐 주고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남녀의 관계는 참으로 지울 수 없는 분명한 정신적 흔적을 남긴다는 이 사실을 명심하여 우리 선조들이 정조를 생명으로 여겼던 그 귀중한 가르침을 진지하게 마음에 되새기고 살아야합니다.
절제의 고귀함
그뿐 아니라 결혼한 부부라 할지라도 부부의 삶은 절제를 통해 심화되고 성숙됨을 알아야 합니다. 신학생시절 윤리신학 교수신부님이 우리에게 당부한 교훈이 생각납니다. 교회의 전례주기에서 대림절 또는 사순절과 같은 속죄와 절제의 시기에 부부생활을 자제토록 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대하여 현대인들은 때로는 비웃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러한 절제의 기간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돈독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부부의 삶이란 소유적 관계가 아닌 존재론적 관계로 이해해야 할 수덕과 극기(克己)의 삶입니다. 절제와 극기를 통해 부부의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서로의 신뢰가 확인됩니다. 저는 혼인교리 때, 젊은이들에게 이 점을 강조합니다. 부부사이라 할지라도 절제가 요구되며 상대방의 마음과 상태를 배려하는 것이 참사랑이고 상대방이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 절제하는 것이 바로 깊은 사랑임을 강조합니다. 부부의 만남, 부부의 결합, 이 자체가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임을 감사하면서 부부생활을 바로 기도와 봉헌으로 승화하는 삶이 모범적, 윤리적 삶이며 동시에 깊은 영성적 삶임을 되새깁니다.
사목헌장은 부부의 삶에 대한 다양한 문화의 형태와 표현을 나름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각 나라와 문화에 따라 혼례식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은 진지성과 고귀성, 인격에 대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사실 인생의 절정기는 결혼이며 이때 신랑 신부의 모습은 가장 아름답습니다. 결혼 때의 이 아름다운 모습은 바로 하느님 모습의 반영입니다. 이때의 모습과 사랑은 가장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이 남녀의 결합이 바로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고귀한 사랑의 이면에는 언제나 동물성, 야수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영육의 결합체이기에 영적 가치와 함께 본능적 욕구가 엄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늘 의지가 본능의 감정, 육체적 욕구를 제어해, 인격적 가치를 실현하도록 해야합니다. 부부 생활도 본능에만 기초하지 않고 기도와 신앙에 기초한 참으로 정신적으로 성숙한 부부생활을 해야 합니다. 부부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헌신입니다. 곧 자기자신을 내어주는 삶입니다. 결혼이란 바로 배우자에게 자신을 봉헌하는 결단이며 배우자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결혼이란 오직 상대방 배우자 곧 남편은 오직 아내만을 위하여 사는 삶, 그리고 아내는 오직 남편을 중심으로 사는 삶입니다. 때문에 부부사이에 만일 나(ego)라는 이기적 욕구가 위타적 가치보다 우선하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결혼이란 끊임없이 나를 죽이고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절제하는 수덕의 행위입니다. 혼인의 약속과 수도자의 서약이 바로 같은 수덕의 삶임을 새삼 깨닫고 확인합니다.
부부의 마찰을 통해 양보를 배우는 삶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 스님, 교무 등과 함께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종교인 협의회」를 구성하여 함께 일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각자 자신의 종교와 신앙에 대한 긍지와 신념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상대방의 종교와 믿음에 대한 존경과 배려를 갖고 활동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추진하고 협의하는 과정에서는 이견과 마찰도 있습니다. 각 종단의 특징이 있고 축일과 종교의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꼭 실천해야 할 곧 “민족의 일치와 화해”라는 모두가 공감하고 인정할 수 있는 가치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모금방법과 액수 그리고 구체적 실천방안에 있어서는 의견이 갈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한번 있었습니다. 각 교단에서 100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1인당 회비 10,000원을 갹출하여 총 1백만원을 모아 집회 등 그 구체적 실천단계에서 차질이 생겼습니다. 우선 모금 결과 목사님과 교무님들은 실제로 봉헌한 분들의 수만큼 예를 들어 50명이면 50만원, 70명이면 70만원 등 전액이 아닌 모금액수만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스님과 사제는 각기 전액을 완납했는데 100명 전원이 봉헌해서가 아니라 몇 사람이 일단 전액을 봉헌하고 후에 해당자들에게 갹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회 등 실천 방안 때에 목사님과 교무님들은 대체로 신중한 편이며 스님과 사제들은 다소 급하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이때 목사님 한분이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과 스님들은 혼자 사는 분들이라 혼자 결정하면 되지만 우리 목사와 교무들은 부인이 있지 않습니까? 부인들하고 의논을 해야합니다. 부부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우리는 매일 부인눈치보고 부인들의 뜻을 맞추고 부인의 의견을 존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처음에 바늘 끝처럼 뾰족했다가도 하도 부딪혀 닳고닳아서 이제는 뭉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부인들과 삶 속에서 부딪히면서 양보하는 덕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날 그 목사님의 말을 듣고 우리는 웃으면서 응답했지만 참으로 큰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사실 사제와 스님들은 독신이라는 수계적 삶을 살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독불장군, 고집불통 그리고 아이러니칼하게도 자기중심적의 이기적 존재라는 지적도 받습니다. 반면 목사님과 교무님들은 오히려 양보하고 너그럽고 늘 상대방을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면서 우리 사제들의 미숙한 여성관과 권위주의 등의 근본이유를 어렴풋하게 감지했습니다. 독신의 삶을 사는 스님과 사제들은 보통 결혼 생활하는 목사님들과 교무님들에 비해 신자들로부터 더욱 큰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뿐아니라 우리 자신도 일종의 영적 우월감이랄까 수행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것은 불교적 표현으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독신과 결혼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살아가는 삶의 양식과 마음이 중요합니다. 부부생활에서 늘 부딪히고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고 양보하는 삶 가운데 더욱 너그러운 삶을 산다는 그 목사님의 말씀을 새삼 되새깁니다. 모든 부부들의 삶은 결국 끊임없는 자기 죽임(克己)과 양보하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때문에 부부의 삶과 가정의 현장이 바로 수덕의 현장, 하느님의 성덕을 배우는 영성의 학교입니다.
일부일처의 사랑
부부생활의 핵심은 친밀하고 깨끗한 결합에 있습니다. 이에 사목헌장은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이혼과 간통 등의 사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간통이란 바로 교통법규적으로 말하면 평생 면허 정지감 입니다. 아니, 그것은 자살과 같은 행위입니다. 매일 매순간 부부가 신의를 지키고 약속에 충실해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법에서도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이 있지 않습니까? 이 원리를 뒤집어서 결혼에 적용한다면 한번 맺은 약속에 대해서는 절대로 다시 논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실천만이 요구됩니다. 이미 48항에서 살폈듯이 이것이 바로 결혼의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입니다. 부부의 신의는 일체의 외도(外道)를 금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혼과 간통 등은 구약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며 이것은 결국 결혼의 본질인 헌신적 사랑을 잊고 본능과 이기적 욕구를 앞세운 동물적 삶에 기인한 것입니다.
결혼이란 남녀 결합이라는 원초적 본능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책무와 윤리적 책임을 동반합니다. 따라서 결혼은 원초적 본능과 윤리적, 사회적 책임사이의 긴장을 조화시켜 인간다운 삶을 영위케하는 자연적 필연적 제도입니다. 따라서 결혼은 늘 건강한 가정을 지향하는 일부일처제를 최고의 가치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일부일처제는 신의와 사랑, 끝까지 항구함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모두 일부일처제와 혼인의 성성(聖性) 그리고 신의를 지켜야할 인간적 책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때 비로소 결혼과 가정의 신성성이 보존되고 확인됩니다.


혼인의 열매
(사목헌장 50항)

과거 윤리신학은 혼인의 일차적 목적을 자녀출산과 교육이라고 못박고 부부사랑을 마치 세 번째 부차적요소로 설명했었습니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전후로 헤링(B.Häring)신부님을 비롯한 많은 진취적 윤리신학자들은 이 순서를 바꾸어 결혼의 본질은 바로 부부사랑이며 부부사랑의 결과로 자녀출산이 이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자녀들을 위한 부모들의 교육책임이 언급되었습니다. 헤링 신부님의 이러한 주장은 윤리신학을 교회법의 부록처럼 다루어 십계명을 중심으로 성사편을 논하면서 이렇게 하면 죄(罪)가 된다 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또한 큰죄(大罪)다 또는 저것은 불가(不可)하다는 등 온통 모든 것을 결의론(決疑論)으로 설명한 기존의 윤리신학체계를 뒤흔들고 그리스도인의 윤리규범은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 곧 사랑에 기초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윤리신학 교재의 제목을 "그리스도의 법"이라 하여 모든 것을 사랑과 자비의 관점에서 다루었습니다. 이것은 1960년대 당시 가히 윤리신학계의 혁명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혼인편에서도 부부사랑을 혼인의 본질로 설명하고 그에 따른 자녀출산과 자녀교육을 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혼인의 1차 목적 또는 2차 목적이라 구분치 않고 전체적 관점에서 혼인성사를 논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앞 항에서 다룬바와 같이 부부사랑을 먼저 논하고 이제는 부부사랑의 필연적 결과 곧 그 열매로서 자녀출산과 자녀교육을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자녀의 출산은 생명의 번식과 계승이라는 자연 원리와 함께 그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이며 축복입니다.
자녀출산 - 생명의 연속
사실 자녀의 출산은 혼인의 필연적 결실이며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일차적으로 “자녀를 낳아 번성하라”(창세1,28)는 말씀에서 확인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보장받은 축복도 바로 그 자녀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해주신다는 것이었고(창세15,5) 땅을 차지하고 장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창세17,3이하) 이와 같이 창세기의 축복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현실적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자녀출산, 땅의 소유, 장수, 이것이 바로 하느님 축복의 기준입니다. 사실 옛 원시시대에는 우선 무엇보다도 자녀가 많아야했습니다. 자녀가 많으면 그 가정은 큰 가정이고 그 차제가 힘이며 부입니다. 농사를 짓거나 동물을 사육할 때에도 일손이 필요한데 자녀의 번식이 바로 큰 재산입니다. 그뿐아니라 원시시대에는 부족중심의 삶으로 때로는 이웃부족들과 마찰과 갈등을 겪고 때로는 다툼과 싸움이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부족의 숫적 우위가 승패를 가늠합니다. 자녀들 특히 남아들을 많이 둔 가정과 부족은 아무래도 다툼에서 쉽게 우위를 차지하며 승리하게 됩니다. 가부장적 시대에 자녀가 많다는 것은 곧 부와 힘 그리고 강력한 수비의 보증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물리적 해석이지만 어연한 원시사회의 현실이었습니다.
자연원리는 번식을 통하여 생명이 유지되고 지속되게 되어있습니다. 사실 신혼부부는 자녀출산을 통해 생명의 고귀함을 몸소 체험하며 그들 스스로 부모가 됨으로써 생명의 고귀한 체험을 통해 새삼 사랑의 위력을 실감하며 새로운 삶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며 이제는 부모자신이 자녀들에게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큰  사랑을 몸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지내는 모습이 아닙니까? 이 때문에 부모와 자녀의 모습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모습이며 생명의 하늘나라의 신비를 드러내는 신비적 표징입니다. 바로 여기에 가정의 신성성과 고귀함이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늘과 같은 존재들이며 특히 갓난아기 시절에는 거의 절대적 존재들입니다. 이 점은 자신뿐 아니라 성장한 자녀들도 깊이 깨달아야 할 대목입니다. 사실 저는 사목자로서 저녁시간에 교우댁을 방문하게 될 때 온 가족이 모여 대화를 나누며 웃음의 꽃을 피우는 장면을 가끔 목격하게 되는데 이 경우 늘 어린아기들이 화제의 중심이며 기쁨의 근거였습니다.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 손자손녀를 두손으로 들었다 놨다 하며 또 두 손을 마주잡고 걸음마를 가르치고 볼을 비비고는 합니다. 사실 제3자인 저 자신에게 이러한 장면은 무덤덤하고 때로는 가족중심이기에 동물적 모습으로 유치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 현상을 넘어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바로 사랑의 현장, 사랑의 본질, 사랑의 삶이구나를 새삼 깨닫곤 합니다. 사실 우리는 영아원 또는 고아원을 방문하면서 수녀님들과 교사 또는 봉사자들이 밤을 지새우면서 온 사랑과 힘을 다 쏟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부모보다 더 큰 사랑을 목격하게 되는데 아무리 수녀님들의 사랑과 손길이 크고 넓다해도 가정안에서 이루어지는 부모의 사랑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바로 이 가정의 삶에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의무적 사랑, 봉사적 사랑은 그것이 아무리 크고 아름다워도 자연적 사랑, 본능적 사랑, 가정의 사랑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어린아기의 걸음마를 지켜보며 웃고 손잡고 대화를 꽃피는 이 가정의 자연적 분위기를 고아원은 결코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새삼 이것이 가정이며 사랑의 교육현장임을 깨닫고 가정의 고귀함을 터득했습니다.
어쨌든 자녀들은 부부사랑의 열매임과 동시에 부부를 묶어주는 끈이며 가정의 등불이고 가정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모의 사랑을 받고 성장한 자녀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부모의 사랑과 은혜를 잊고 때로는 불효의 길을 걷게 되니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부모에게는 부족하고 불효를 하면서도 그래도 부모가 된 그 자식들이 자기 자녀들에게는 사랑을 쏟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자체가 신기하며 신비입니다. 말하자면 고귀한 사랑은 유치한 본능에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질그릇 속의 보화라는 말이 여기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내릿사랑이라고 합니다. 내릿사랑은 자연적 사랑입니다. 그러나 웃사람에 대한 사랑은 참으로 스스로 노력하여 실천하는 덕행(德行)의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자연적 사랑과 덕행의 사랑으로 조화되어 성숙하게 마련입니다.
자녀교육
하느님의 선물과 축복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확인해야 할 부모의 책임은 바로 자녀들에 대한 올바른 교육입니다. 무엇보다도 자녀들에 대한 종교교육, 신앙교육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신자부모들의 종교교육관은 참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초등학교때까지는 어린이들이 부모에게 종속되어 신앙생활도 자연스럽게 잘하는 편이지만 중학생이 된 경우에 물론 사춘기 연령의 학생들 자신의 자립성과 또는 일종의 반항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부모들 자신이 종교교육에 대한 관심보다는 학교공부 쪽에만 신경을 쏟고 있는 실정입니다. 때문에 학교 공부 후에는 과외, 학원 등 온통 학업에만 열중하고 그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아예 주일미사에도 궐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성당 측에서도 중고등학생들에게 배려를 주지 못하는 고정적 틀의 미사와 교리체계 등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 보다는 부모들 자신이 갖고 있는 종교 교육과 신앙교육에 대한 냉담한 자세가 일차적 원인임을 우리는 겸허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자녀교육은 이점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모로서 우리는 과연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얼마나 큰 마음을 쏟고 있는지 하느님 앞에 진심으로 반성해야 합니다.
자녀수의 조절 - 인구조절
오늘날 인구문제는 매우 심각합니다. 얼마 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인구감소는 OECD국가에서 두 번째라는 것입니다. 사실 상식적 원리로 계산하자면 부부는 둘 사이에서 적어도 두 자녀가 출산해야 인구수의 현상을 유지할텐데 오늘 우리의 경우에는 두 부부가 한명도 못되는 0.7명 정도를 출산한다니 인구감소는 사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인구가 너무 많아서 60년대 이후 독재 군사정권의 이른바 개방정책과 함께 산아제한 정책 등 인위적으로 자녀들의 수를 제한하고 인공피임은 물론 심지어는 낙태 등을 거의 묵인할 정도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 교회는 사목적으로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 21세기 최첨단 과학문명과 함께 가장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며 산아제한에 앞장섰던 백인들이 이제는 흑인들도  중남미계의 이민자를 그것도 아시아계의 사람들이 자녀를 많이 낳아 번성하게 되자 백인들의 인구감소와 함께 비 백인계의 인구팽창에 불안을 느꼈던 나머지 유다계를 중심으로 한 백인들이 자연스럽게 위기를 느끼며 이심전심으로 자녀 둘 이상을 낳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기와 배경은 우리에게 다소 달갑지 않지만 어쨌든 정신을 차려 자녀를 더 낳아야겠다고 자극을 받은 것은 교회적 처지에서 볼 때는 긍정적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에는 참으로 좁은 땅에 더구나 아파트 건축 등으로 인한 난개발과 함께 화려한 삼천리 무궁화강산이 온통 아파트 건물공해로 시름을 앓고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면서도 유럽과 미국 등 새바람을 쫓아 어줍짢게 너도나도 자녀를 한명 정도만 낳고 있으니 인구는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남아만 선호하고 여아는 인공중절 등 방법으로 거부하고있는 실정이니 20년 뒤에는 성의 불균형한 비례로 이제는 여성의 심각한 감소로 뜻밖의 엉뚱한 문제가 야기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인구정책은 한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문제입니다. 국가영토와 지구촌의 영역은 일정한데 인구만 무작정 증가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교회도 국가의 인구조절 정책에 동의를 표하지만 그거나 그 방법은 강제적이거나 비도덕적이어서는 안되며 자연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그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생명과 품위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해치는 인공산아제한이나 인공중절은 반대하며 부부의 합의와 절제 그리고 자연적 방법으로 이루어지기를 명하고 있습니다.
자녀수를 결정하는 것은 부모만의 권리
특히 부부자신이 하느님과 역사 앞에 전적으로 책임을 갖고 그 자녀수를 정하며 결정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국가공권력이라 하더라도 자녀의 수를 법적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중국의 경우 각 가정은 자녀 한명만을 출산할 수 있고, 소수민족에게는 두명을 허락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호적에 오르지 못한 많은 자녀들이 무수하고 이들은 법적으로 국민의 권리와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교회는 강한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국가정부라 하더라도 자녀들의 수를 제한할 수 없고 자녀조절의 문제는 부부들의 고유한 권리와 영역임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중국의 경우와는 전혀 사정이 달라 오히려 부부자신이 자녀를 낳지 않기 때문에 걱정입니다. 때문에 부부는 자녀를 낳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해야 합니다. 사실 자녀출산은 부부사랑의 핵심적 열매입니다. 과일나무에서 꽃만 보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자연의 원리에 반할 뿐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큰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자녀 없는 부부들을  위한 배려와 기도
사목헌장은 자녀가 없는 가정을 배려하며 이들을 기억합니다. 자녀출산이 혼인의 필연적 열매이지만 비록 자녀가 없더라도 부부가 서로 신의를 지키며 성실한 삶을 살도록 당부합니다. 사실 자녀가 없으면 일반적으로 그 가정은 좀 쓸쓸해 보입니다. 그러나 혼인의 본질은 부부사랑이기에 여러 가지 이유로 자녀를 갖지 못하는 부부들은 서로에 대한 신의와 사랑으로 더욱 깊고 심오한 삶을 살도록 격려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아무리 자녀를 원해도 자녀가 없는 가정이 있습니다. 자녀를 둔 가정은 이들 가정에 대해 따뜻한 배려와 사랑을 갖고 이들의 더욱 깊은 사랑을 칭송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사이 젊은 부부들은 자녀를 때로 짐으로 여겨 자의적으로 자녀출산을 기피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물론 부부의 합의와 책임이 중요하지만 한번쯤 더 깊이 생각하여 자녀를 간절히 바라지만 자녀가 없는 부부를 생각해서라도 또한 자녀가 하느님의 선물과 축복임을 생각하여 다소 부부중심의 이기적 사고를 바꾸어 자녀를 갖도록 해야 합니다.
사목헌장은 비록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배경에는 평신도교령 11항의 가르침을 따라 입양 곧 양자녀를 받아들이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많은 영아들이 외국으로 입양되는 슬픈 현실에 대해 우리는 함께 반성하며 외국인들의 깊은 사랑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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