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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 51항 - 부부애와 생명의 존엄성
   함세웅 신부   2004-08-08 10:30:50 , 조회 : 2,067 , 추천 : 313

    사목체험 1

    30여년 전 제가 첫 본당에서 사목하던 때 교우 가정을 방문하며 구역미사를 봉헌했던 날이었습니다. 미사 후에 본당과 관련된 여러 사안을 주제로 대화를 주고받던 중 여교우 한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신부님, 저희 부부는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는데 저희 형편으로는 자녀를 더 갖기가 매우 힘듭니다. 인공피임은 교리적으로 안된다고 들었습니다만 저희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 하면서 말끝을 흐렸고 때문에 분위기가 다소 굳어 졌습니다. 저는 잠시 생각한 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하셨습니까?”하고 되묻고 이어 “제가 구태여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으면 부부들이 양심적으로 알아서 하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질문하셨으니 저는 사제로서 공개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인공피임은 원칙적으로 안됩니다. 원칙적이란 뜻을 잘 아시고 실천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윤리신학에서 배운 많은 내용을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특히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악은 허락된다”는 윤리원칙도 설명하면서 하느님께 기도 드리면서 양심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자녀의 수를 결정해야함을 일러주었습니다. 또한 확실하지 않고 잘 모르는 경우에는 자신의 양식과 양심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서 하느님께 기도 드리며 선택하라는 인격적 원리도 깨우쳐 주었습니다.

    사실 인공피임 문제는 사전․사후 등 여러 유형의 의약품과 기구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여인들의 건강과 직결되어 있고 특히 이로 인해 여인들은 비정상분만과 함께 상상하기 어려운 후유증으로 기형아들의 출산 등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점을 감안할 때, 남녀의 관계 그리고 부부생활은 신앙인으로서 절제를 통해 완숙된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게 됩니다. 그러나 절제 원리 하나만으로 개방된 사회에서 복잡 미묘한 부부의 성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고민, 교회의 사목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현실적 어려움 자체를 논의하고 함께 생각하는 것, 이 자체가 바로 신자들과 함께 하는 교회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사목체험 2

    1984년 말 구의동 성당에서 사목할 때의 일입니다. 10여년 전 첫 본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던 여대생이 이제는 졸업 후에 여러 일에 종사하다가 구의동 근처 큰 회사 부사장겸 기숙사의 사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는 그 공장에서 만든 남방셔츠 두벌을 가지고 왔는데 당시 시가로 5-6만원 정도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서 “신부님, 이 옷을 하나 팔면 저는 그 돈으로 야채시장에 가서 배추와 무 등을 한 트럭정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배추와 무를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좋기는 한데 이 옷 한벌과 배추 한트럭의 값이 같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대화 등을 나누면서 저는 그 교우를 통해 현장의 삶을 간접으로 접하면서 사목적으로 많은 것을 배우곤 했습니다.

    그로부터 들은 얘기는 너무도 많고 교훈적이었습니다. 하나를 더 소개합니다. “신부님, 그동안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시지요? 저는 그동안 피눈물나는 노력을 해서 이 자리까지 왔어요. 남성들과 대결하고 남성들을 능가하여 승진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교통사고도 있었어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극복했어요. 그런데 남자들도 별 것 아니예요 돈 앞에, 권력 앞에서는 다 무릎을 꿇고 맙니다. …” 이런 대화와 함께 그는 그 자신이 걸어온 나름대로의 파란만장한 삶을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를 통해 많은 자극을 받고 또한 삶의 귀중한 체험을 터득했습니다. 특히 그는 동남아 일대를 다니면서 사업에 열중했는데 싱가포르인지 말레시아에서 대단한 중국계 갑부를 만났답니다. 사업관계상 그분을 자주 만나 사귀고 그 성공의 비결을 전수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답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날 때마다 돈을 잘 벌 수 있는 비결, 갑부가 된 비결을 알려달라고 졸랐답니다. 몇 해가 지나 귀국할 때쯤 중국계 부자가 자기 집에 그를 초청하여 진수성찬을 차려주며 송별식을 해 주었답니다. 식사 후 모두 다 가고 난 뒤에 그 부자는 그 여교우에게 정말 돈을 크게 벌고 싶으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빙그레 웃으면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분의 뒤를 따라갔더니 그 집 뒷동산에 몇 개의 묘지가 있더랍니다. ‘이상하다 왜 이 묘지로 날 데려왔지!’ 하고 별 생각이 다 머리를 스쳤는데 그 부자는 묘지에 묻힌 분들을 설명하면서 맨 위에 계신 분들은 고조부모, 그 다음은 증조부모 그리고 조부모, 부모 등의 묘지임을 설며해 주었습니다.

    이 분들이 중국에서 이곳에 이민 온 것은 100여년 전 인데 자신이 이렇게 갑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4대 5대 조상들의 피눈물나는 노력의 결과라 하면서 그 여교우에게 참으로 큰 부자가 되고 싶거든 지금 노력하여 5대 후손에게 그 은덕을 물려주라고 말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무도 부끄럽고 자기 당대에 벼락부자가 되려고 안절부절하는 자신을 크게 반성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네의 벼락꿈과 한탕주의식이 지적을 받은 셈입니다.

    바로 그가 어느 날 저에게 사감으로서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기숙사에는 10대말 20대 초의 이른바 공돌이 공순이들이 있는데 이들이 열심히 일하며 회사도 잘 다니고 또한 월급을 저축하며 잘 지내고 있지만 젊은이들인지라 뜻밖에 임신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미혼모가 되는 경우 출산 뒤 즉시 자녀를 홀트복지기관 등 입양기관으로 보내는데 이때, 그 미혼모는 모성애가 발동하여 병이 나고 거의 정신이상자가 될 정도랍니다. 그래서 그는 미혼모들의 아픈 체험을 보면서 교리적으로는, 어떻게 임신되었든 그 태중의 아이를 출산해야 하지만 이 미혼모의 고통은 과연 누가 보상해 주고 보살펴 주는가 하는 큰 회의감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교리적으로는 비록 어긋나지만 젊은이들이 순간의 잘못으로 임신한 경우, 본인들이 병원을 찾아가 임신중절을 하도록 권한다는 것입니다. 임신중절도 물론 큰 죄이고 그로 생기는 아픔이 있지만 일단 수술로 정리하면 큰 후유증 없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교회의 원칙을 따라 미혼모로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기를 수도 없게 되거나 또는 그 아기를 입양시킴으로 당하는 평생의 아픔과 고통보다는 그래도 인공중절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원칙만 가르쳤지 그로 인해 생기는 현실적 어려움을 전혀 생각지 않고 책임을 지거나 도움도 안주니 자신의 결정이 오히려 실천적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신앙인으로 그가 책무를 다하지 못한 부적절한 죄인임은 늘 겸허하게 인정하였습니다. 어쨌든 저는 저 나름대로 사제로서 남녀관계의 책임성, 어떠한 경우에도 생명의 가치가 우선한다는 교회의 공적 가르침 등 그동안 듣고 배운 가르침을 기초로 열심히 설명하고 했지만 결국 그 여신자에게는 공허한 이론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목현장에서 만난 이러한 고민과 갈등은 풀 수 없는 문제로 늘 제 머리에 남아 있고 2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여 교우의 지적이 제 머리에 맴돌고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사제로서 신앙인으로서 이웃과 세계의 문제를 함께 껴안고 고민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원칙과 현실 그리고 상황윤리

    사실 성서의 가르침과 교회의 원칙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복잡합니다. 원칙하나로 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신학자들은 ‘상황윤리’를 이야기합니다. 원칙이란 절대불변의 보편적 기준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조건에 따라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칙을 비켜갈 수 있는 또는 넘어설 수 있는 비약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상황윤리’에 대해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고 또한 교회도 이 점에 대해 신중하도록 늘 경고하고 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상황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윤리원칙을 넘어서십니다. 이러한 불가피한 ‘현실상황’ 속에서 신앙인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가 늘 우리에게는 숙제로 남습니다.

    우리는 사목현장에서 그리고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참으로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모순 또는 불가능한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 윤리원칙만이 과연 유일한 기준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서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마음 아파하는 동정과 배려를 지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목헌장의 정신입니다.

    어쨌든 교회의 가르침은 첫 번째 어떠한 경우에도 인공중절 곧 낙태는 불가하다는 원칙을 선언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자연법에 기초한 하늘의 명령입니다. 사실 인공중절은 심리적으로 실제로 엄청난 상처나 흔적을 안겨줍니다. 이 부분은 성개방 시대에 특히 성(性)의 인격적 의미를 잊고 본능적으로 접근하는  젊은이들이 깊이 깨닫고 실천해야 할 사항입니다.

    생명이란, 그 자체로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존재와 상황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절대적 가치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도 생명을 죽일 수 없다는 철칙이 바로 상황윤리에 적용된다면 그 불가피하다는 ‘상황’은 태아의 생명 앞에서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지는 생명수호의 윤리, 하나의 예외가 허락되면 모두가 예외일 수박에 없는 인간의 다양한 삶의 구조 속에서 교회공동체는 여전히 이 생명의 윤리를 성서와 자연법에 기초하여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목헌장은 현실의 어려움과 고민을 함께 걱정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두 번째 산아조절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앞항에서도 언급했지만 늘 부부애와 신의 그리고 절제와 함께 하느님 앞에서 부부가 양심적, 인격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꼭 자연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윤리와 함께 진보적 신학자들은 어차피 임신하면 꼭 낙태할 수밖에 없는 경우라면 그 개별적 경우에는 이들에게 ‘낙태라는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하여 인공 피임이라는 작은 악을 허용해야 되지 않느냐?’는 논리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풀어 말하면 인공중절 또는 낙태는 절대로 불가하고 용납될 수 없지만 상황에 따라 적어도 자녀문제로 고민하는 부부의 경우에는 그 부부가 신앙의 결단으로 자녀수를 조절할 수 있고 또한 임신할 경우 낙태할 수밖에 없는 경우라면 그 낙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사전 또는 사후 피임을 하는 것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부부들에게 책임 있게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목헌장은 신법에 대한 교회의 원칙적 해석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51항의 핵심입니다. 여전히 고민은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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