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udium et Spes Pastoral Institute *
 

 

 


 
 
 
 
 
 

 


   

민중의 벗 김승훈 신부 추모10주기 ... 신부님 그립습니다. (오마이뉴스)
   기쁨과희망   2013-09-16 16:14:21 , 조회 : 949 , 추천 : 127

"내 이름 필요하면 마음대로 갖다 써"
민중의 벗 '김승훈 신부' 추모10주기 ... 신부님 그립습니다.


1998년 11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일하던 천주교 인권위원회로 나이 지긋한 어머니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알고보니 지난 1974년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 당시 사형된 분들의 부인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저 역시 이분들을 뵙기 전까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실체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유신독재 체제 하에서 벌어진 수많은 인권유린 사건으로만 알고 있었지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어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알게된 실체적 진실은 참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이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하자고 모임을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민청학련'의 배후 조직으로 왜곡하고 부풀리고자 고문을 가했고, 결국 이후 형식적인 재판 과정을 통해 관련자 8인에게 사형이 선고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실입니다(관련기사 : 어머니의 눈물 외면한 박근혜의 두 얼굴).

"너도 니 아버지처럼 사형되어야 해"

그날 어머니들이 감당해온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작된 사건으로 남편과 가족을 억울하게 잃은 것도 모자라 남은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수모는 참담했습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다고 어머니들은 입을 모았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빨갱이로 사형된 아버지를 뒀으니 아들인 너도 사형되어야 한다"며 한 희생자의 아들을 동네 나무에 묶어 놓고 '총살 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마을 어른 중 말리는 사람은 없었답니다. 옛일을 떠올리던 한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느날, 소풍을 간 아이가 싸간 점심 도시락을 먹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도시락을 열자 "빨갱이도 밥을 먹냐"며 아이들이 흙을 뿌렸다는 것입니다. '빨갱이 사형수의 아내'라는 딱지로 인해 본인이 겪은 고통도 말할 수 없이 컸지만, '빨갱이 자식'이라며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한 것이 가장 서글펐다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곤 저 역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여전히 '금지어'였습니다. 그때가 관련자 8인이 사형을 당한 1975년으로부터 무려 23년이 흐른 1998년이었지만, 더구나 정권교체를 통해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해였지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여전히 끔찍한 '공포'였으며 막연한 피해 의식을 자극하는 단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는 이 억울한 호소에 화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주교 인권위원회의 집행위원회를 통해 인혁당 재건위 가족분들이 요청한 명예회복에 대한 호소를 전달했습니다. 예상처럼 여러 논의가 있었습니다. 특히 '국가 내란 음모'로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되어 사형까지 집행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 8인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것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권단체로서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결론 끝에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는 각계 인사를 망라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문제는 이 대책위원회의 대표를 누가 맡을 것인가 였습니다. 설왕설래 하던중 나온 이름이 바로 김승훈 신부님이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김승훈 신부님은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 물고문 사건 당시 가해 경찰관이 더 있음을 은폐했다고 폭로하여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하신 신부님이셨습니다. 이러한 신부님께서 대책위원회의 대표를 맡아주시면 큰 힘이 되겠지만 과연 맡아 주실까 속으로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신부님께 찾아가  조심스럽게 말씀을 여쭈었습니다.

"저, 신부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저희가 이번에 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당시 희생된 여덞 분의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 활동을 하려고 하거든요."

신부님께 그간의 경위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희생자 부인과 가족이 찾아온 이야기와 그 분들에게 듣게된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이제 남편과 가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도와달라는 호소까지 제가 할 수 있는 논리와 설득력을 다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신부님이 대책위원회 대표를 맡겠다며 승낙의 말씀을 주시도록 하겠다며 열심히 설명을 하던 그때 였습니다. 잔잔한 미소로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신부님이 조용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 스테파노. 그러니까 나보고 거기 모임에 대표를 맡아달라고 하는 거지? 알았어. 필요하면 내 이름 얼마든지 갖다 써. 내 이름이 뭐 대단하다고."

'민중의 벗' 김승훈 신부님, 잊지 않겠습니다

  
그랬습니다. 제 기억 속에 김승훈 신부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사건이 난 후 그 아버지 김척 예비역 장군이 찾아와 달라고 호소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명동에 있던 천주교 인권위 사무실을 찾아 올 때마다 신부님은 제일 먼저 저를 찾아 "그동안 김훈 중위 사건이 어떻게 되었냐"며 관심있게 묻곤 했습니다. 때로는 혀를 차고 때로는 국방부가 너무한다며 기가 막혀 하시기도 했습니다. 이후 신부님이 군에서 사망하는 군인들의 의문사를 규명하기 위한 추모 미사를 집전하며 국방부의 회개를 강도 높게 촉구한 이유입니다.

고통은 어렵고 힘든 이에게 가혹합니다. 피할 길도 없고 기댈 언덕도 없는 그 속에서 김승훈 신부님은 늘 큰 우산과 같은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특히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철거용역업체 '적준'을 처벌하기 위해 인권단체가 최초로 나섰던 1998년에도 신부님은 기꺼이 대표를 맡아 종교인 신분으로 서울경찰청 특수수사과에 '적준용역'의 사장을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김승훈 신부님에 대한 일화는 언급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제가 직접 신부님과 함께했던 일만 언급해도 그렇습니다.

이런 신부님이 우리 곁을 떠난 때가 지난 2003년 9월 2일이었습니다. 1939년 평남 진남포에서 태어나 만 64세의 일기로 선종하신 것입니다. 1976년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의 대표를 시작으로 유신독재에 항거했던 김승훈 신부님. 이후 '민주구국선언' 미사에서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강론으로 고초를 당했고 1979년 YWCA 위장 결혼식 사건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해 큰 나무 역할을 해 오신 분입니다.

2013년 9월 2일.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의 선종 10주기를 맞아 신부님을 추모하는 분들이 명동 카톨릭회관 1층 강당에 모여 추모의 밤을 보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백기완 선생님을 비롯하여 이해동 목사님, 이철 전 의원 그리고 각계의 민주 인사가 함께 모여 신부님의 추모 영상을 보고 그때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한편으로 기뻐하고, 다른 한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나눴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요즈음입니다. 이럴 때 잔잔한 미소로 지켜보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격려해 주셨던 신부님이 계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신부님께서 늘 해 주셨던 그 말씀이 다시 가슴을 울리며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그래. 그렇게 힘들면 내 이름 갖다 써."

김승훈 신부님. 신부님의 이름으로, 신부님이 염원하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활짝 핀 세상을 위해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고 김승훈 신부님의 10주기 선종을 추모합니다.


고상만(rights11) 시민기자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8tu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