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udium et Spes Pastoral Institute *
 

 

 


 
 
 
 
 
 

 


   

'來世란 무엇인가?'
   정태옥   2015-03-04 00:03:21 , 조회 : 675 , 추천 : 105

물론 내일도 來世임에는 틀림없지만, 가톨릭(기독교)에서 來世란 몇 가지 특수성을 띠고 있다. 

첫째 : 죽은 후 천당과 지옥의 세상이며, 종말 이후 부활하는 이원성이다.
둘째 : 현세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상 - ‘생성과 소멸’의 윤회가 없는 세상이다. 
셋째 : 개체차원의 來世이며, 신앙에 의해 구원된다.
      
오늘날 샤르댕을 비롯한 몇몇 신학자들에게 來世는 연속되는 일원성이며, 공유성의 중심성에서 공통성의 나눔을 통해 ‘오메가 포인트’ - 수렴에 이르는 그리스도론에 의해 來世가 완성된다고 보고 있다. 본인 또한 이 논리로 來世를 살펴본다.
 
흙에서 생명이 출현하기 까지 약100억 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또한 생명에서 인류가 출현하는 데는 약40억 년이 걸렸다. 물질(이하 무생물 물질을 뜻함) - 생명 - 정신은 전혀 질적으로 다른 물질의 출현현상으로서, 물질에서 바라보는 來世는 생명이었으며, 생명에서 바라보는 來世는 정신이며, 정신이 바라보는 來世는 - 오늘날 우리는 그 來世가 어떤 세상인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물질 -생명 - 정신의 출현과정을 미루어 보아, 현세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세상이 오리라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물론 오늘의 현상이 내일로 축적 연장되지만, 그 시간의 장구함과 질적인 변화를 내일이라는 짧은 시간으로, 來世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는 세상을 자본주의의 몰락까지만 보았지만, 가톨릭(기독교)에서 來世란이보다 훨씬 먼 앞날을 바라본다.

마르크스의 미래는 건설된 공산산회이지만, 가톨릭(기독교)에서 來世란 물질의 비가역성 즉 영생의 세상이다. 유토피아 공산사회에서도 인류의 삶과 죽음의 윤회를 못 벗어난다면 來世일 수는 없다. 마르크스는 來世란 종교가 만들어낸 허구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난 138억 년 간을 되돌아보고 물질 - 생명 - 정신의 그 질적인 출현과정을 볼 때, 현생인류가 변하지 않고 영원무궁하게 인류로 존재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인가? 물론 종교에서 來世란 죽은 후 영혼이 머무는(천당과 지옥) 세상이며, 궁극적으로 종말이후 부활을 믿는 신앙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허구’일지 모르지만,(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허구’라 믿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는 종교의 교의이지 來世 자체는 아니다. 누구든지 물질 - 생명 - 정신이 출현한 과정과 현재란 축적된 과거라는 사실만 인식할 수 있어도, 來世는 저절로 인식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삶이란 죽음보다 불확실하다. 그 불확실성의 연장선에서, 來世는 어떤 의미인가?

물질은 그 자체가 어떤 내력을 갖고 있는 정보이지만, 물질에서 정보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성장하거나 진화하기 위해서는 직접 물질의 덧붙임뿐이다. 물질의 덧붙임 현상으로 중력(핵력, 전자기력)이 발생하여 커지고, 그로인해 물질간의 균형을 이루는 세상이 되었을 때, 생명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생명은 물질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현상’의 정보만을 암호화(RNA - DNA)하여 ‘폐쇄된 영역’ 생물을 출현시켰다. 생물에서 ‘살아 있다’는 의미는 곧 ‘RNA - DNA’(단백질 프로그램)에 의해 물질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생명현상’이다. (휴심정 개똥소똥 1911번 ‘생명과 생물’ 참조)  

유기질에서 ‘RNA - DNA’의 출현이야말로 생물과 무생물을 가르는 분기점이며, 실질적으로 생명은 자신을 낳은 물리법칙에서 독립된 성장과 진화가 시작되었다. 만약 유기질이 무기질과 같이 ‘덧붙임 현상’만 일어났다면, 생명의 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질에서 필요한 정보만을 인식하여 분리 할 수 있는 능력 - 생명이 출현함으로써 물질은, 단백질 정보의 세상에서 처음으로 - 본능이긴 하지만 - 선택과 개체성을 띠는 ‘자신’이 되었으며, 실눈을 가늘게 뜨고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결국 생명은 물질의 의식화 - 대상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 현상이며, ‘생성과 소멸’이라는 물리법칙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물질이, 생물의 번식과 진화를 통해 생명의 연속성을 획득함으로써 ‘불멸성’을 향한 첫 걸음이 되었다. 완성된 물질의 來世이다.

생물은 ‘폐쇄된 영역’에서 일어나는 ‘생명현상’으로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살아가기(생존, 성장, 번식)위해 외부로부터 끊임없는 물질과 에너지의 획득과 공급이 필연인, 절대 외부 의존성 존재물임을 본능으로 인식하고 있다. 생물은 ‘RNA - DNA’라는 단백질 생명정보의 프로그램 - 본성에 따라 생존특성을 가지며, ‘폐쇄된 영역’으로서 독립된 개체가 하나의 종(種)을 형성하고, 나아가 생물 전체의 ‘생명권’을 형성하여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오감에 의해 정보의 인식과 공유의 확대를 의미하며, 동물의 진화에서 의식의 증대를 가져와 인류가 출현하는 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인류가 출현했을 때는 3차원의 세상에서 본성으로는 완전한 존재가 되었지만, 번식과 진화라는 공간의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인류는, 아직은 한 쪽 발이 ‘폐쇄된 영역’ 생물에 놓여 있으면서, 한 쪽 발은 ‘폐쇄된 영역’ 밖에서 자연(생명)환경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부 곤충과 동물들이, 자신이 사는 집과 먹이를 농사짓는 수준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상이다. 수억 년 전에 출현한 개미와 꿀벌의 집은 변함없이 오늘날도 똑같은 모양이지만, 움집은 수백 층의 고층 빌딩으로 변했다. 바로 문화, 문명의 발생이다. 생물의 한 種인 인류에게 어떤 능력이 있어(또는 발생하여) 문화, 문명을 형성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문화, 문명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옛 부터 종교와 철학은 이 능력이 인간의 영혼에 의한 ‘정신현상’이라 생각했으며,  일부 분자생물학자들은 ‘정신현상’을 일으키는 유전체가 존재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영혼설과 유전체설은 ‘정신현상’이 인간 내부에서 발생하여 사회성을 형성하고, 다시 개체에 영향을 준다고 보고 있다. 샤르댕을 비롯해 소수의 신학자들은, 1801년 생물학의 창시자 라마르크(1744-1829)는 그의 저서 ‘동물학 강의 서설’에서 처음으로 진화를 언급한 이래, 인류는 진화의 산물로서 ‘정신현상’ 또한 진화의 연장선에서 이해하고 있다.

DNA-생명권 공진화의 정점에서 출현한 인류는 개체가 하나의 생명권이다. 유리창 너머 현상이, 인간에게 존재하는 약30억 개 ‘RNA - DNA’ 단백질 정보의 현상이라는 의미이다. 최초의 인류 자체가 본성으로 완전한 존재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것은 사과이다.” “저것은 강아지 이다.”라고 알 수 있는 근원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침팬지도 사과나 강아지를 인식 할 수 있지만, 침팬지에 따라 ‘돌맹이와 염소’ 또는 ‘배와 양’으로 각각 자신들의 기준으로 사물을 인식한다. 때문에 ‘사과’나 ‘강아지’라는 공동 지식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사과’나 ‘강아지’가 공동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정보의 전달 수단‘과 ’정보의 공유성‘에 일치된 견해가 필수이다.

인류와 침팬지의 ‘RNA - DNA’ 염기서열 1.6% 차이는 ‘정보의 전달 수단’과 ‘정보의 공유성’에 차이가 있다. 인간의 뇌는 척추와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 성대의 길이가 길어 20~26가지 다른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언어로의 진화가 가능했다. 그러나 침팬지는 뇌가 척추에 구부러져있어 성대가 짧아 5~6가지 소리밖에 낼 수 없기 때문에 언어로의 출현이 불가능했다. 인류의 직립보행 - 언어의 발달 - 뇌의 진화는 언어라는 ‘정보의 전달 수단’과 ‘정보의 공유성’을 크게 향상시켜 침팬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결국 일단의 꼬리 없는 원숭이들 중에 직립보행이 인류와 침팬지를 갈라놓은 분기점이 되었다.

생물(본성)에 나타나는 ‘정보의 공유성’에는 통신(오감)에 의해 공유되는 ‘생활 정보’와 性에 의한 유전자 교환과 진화를 통해 공유되는 ‘생식 정보’가 있다. ‘사과’와 ‘강아지’라는 언어는 ‘생활정보의 공유성’에서 일치된 결과물로서 하나의 ‘정보의 정보화’ 현상이다. 즉 앞에 ‘정보’는 개체가 인식한 ‘정보’이며, 뒤의 ‘정보’는 공유되는 ‘정보’이다. ‘정보의 정보화 현상’은 일부 곤충과 동물에서도 나타나는 본성으로서 인간 고유의 현상은 아니다. 다만 ‘정보화 현상’이 일부 곤충과 동물에서는 프로그래밍 되어 있거나 1~2번에 끝나기 때문에 개미와 꿀벌의 집과 같이 변함이 없고 침팬지에서 문화, 문명이 출현하지 못했다.

인류는 언어의 발달과 뇌의 진화가 반복되는 ‘정보의 정보화 현상’을 일으켜 문화, 문명을 발생시켰다. 양자 역학의 확률과 통계에서 생성되는 수많은 ‘시행착오’의 분자수준의 연장선이며, 하나의 ‘생명권’, 약30억 개 단백질 정보를 갖고 있는 인간은 의식의 공유를 통해 반복되는 ‘정보의 정보화 현상’이 가능했다. 여기에는 정보의 통신과 공유만 있어도 충분하다. 인간 내부에 ‘정신현상’을 일으키는 영혼이나 유전체가 존재하지 않아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의식의 공유를 통해 생성되는 정보를 정신이라 하며, ‘정보의 정보화 현상’을 ‘정신현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즉 ‘정신현상’은 인간 내부가 아니라 외부 현상이다.

생물에서 출발한 인류는 처음부터 오늘날 우리와 같이 행동과 의식에서 ‘본성’과 ‘이성’이라는 뚜렸한 이원성이 나타나는 존재는 아니었다. 생물에서 물려받은 인간의 본성은 ‘폐쇄된 영역’ 개체성이지만, 이성, 양심, 정의, 도덕 등은 사회에서만 형성되는 정보(정신)의 일치된 공유성 -  ‘개방된 영역’ 사회성이다. 여기에서 인류의 행동과 의식에 ‘본성’과 ‘이성’이라는 선택성의 이원성 존재가 되었다. 인류의 진화는 100% 본성에서 이성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다. 어린이의 성장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류의 성장은 어린이의 성장과 같다.”고 인식했다. ‘헤겔’은 ‘동적인 의식’으로 철학을 인식한 탁월한 철학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성이 출현하는 ‘정신 현상’이 인간 내부의 현상이라는 ‘관념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성, 양심, 정의, 도덕 등 ‘개방된 영역’ 사회성은 인간과 인간의 ‘응축된 생명에너지’ - 물질도 생명도 아닌 제3의 물질 - 정신에 의해 형성된다. 때문에 인간 내부에 저장되거나 ‘RNA - DNA’ 단백질 정보로 유전은 불가능하다. 뇌에 저장된 사회성은 단백질로 전환된 지식으로서 ‘응축된 생명에너지’가 아니기 때문에, 지식의 축적이 인성(불성, 영성)함양에 직접요인이 아니다. 지식이 지성으로 전환이 절대 조건이며, 여기에는 ‘폐쇄된 영역’에서 ‘개방된 영역’으로 몰입하고자 하는 의지와 행동이 필연이다.

문화, 문명은 정신의 구현이며, 사회유전자를 형성하여 연속성을 이어간다. 인간 개체는 사회유전자를 형성하는 정신 소립자로서, 생명이 아닌 정신으로 존재한다. 즉 천당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살아서 가는 곳이라는 뜻이다. 현세가 있어 來世가 오는 이유이며, 우리가 ‘RNA - DNA’에 의한 생물의 진화가 인간에게서 끝났다고 보는 이유이다. 물질이 단백질에 의해 의식화 되어 생명으로 출현했듯이, 현상은 인간에 의해 정신화 되어야 한다. ‘폐쇄된 영역’ 본성에서 ‘개방된 영역’ 본성으로 새로운 질서의 출현이며, 완성된 생명의 來世이다.

동적이고 온전한 3차원의 세상에서 출현한 인류에게 세상은 갓 태어난 어린이와 같이 ‘점’ - 1차원의 세상이었다. 인류가 진화함에 따라 어느 시점에서부터 현상을 2차원 평면과 3차원 공간으로 인식하였지만, 의식에서는 오랫동안 ‘정적인 세계관’ - 현상은 절대 변하지 않는 고정된 세계관 -에 머물러 있었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물리학에서 처음으로 인식된 ‘동적인 세계관’이, 의식에서 -세상이 무엇인가로 되어가는 - ‘동적인 세계관’으로의 전환은, 19세기 라마르크와 다윈의 생물 진화설이 발표되었지만 생물에 국한되었으며, 철학과 신학에서 사고의 전환은 20세기 중반 샤르댕에 의해서이다. ‘정적인 세계관’에서 ‘동적인 세계관’으로 의식의 전환은, 집중 - 분산 - 공유 - 수렴이라는 의식과정을 통해 - 변화하는 세상 - 변화되어 되어가는 세상 - 변화하여 무엇으로 되어가는 세상으로 전환된다.

‘정적인 세계관’에서 인식되는 지구는 평평하며,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서 ‘空’개념은 모자이크로 인식된다. 여기에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흐름으로 인식되어 성장과 진화 등 ‘시간의 축적’이라는 개념이 없다. 또한 물질의 ‘생성과 소멸현상’에서 에너지 - 물질이라는 평면순환만 인식하지, 프렉털 구조(3차원 이상의 ‘空’개념으로서 러시아의 인형 ‘마트로시카’처럼 공간이 다른 층층 구조)와 에너지의 순환과 이에 따라 공간의 압축현상을 인식하지 못한다. 여기에서는 來世에 관한 논의이기 때문에 자세한 과정은 생략한다. (휴심정 - 벗님글방 - 샤르댕 사상 참조)

붓다와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한 불교 철학과 스콜라(가톨릭) 철학은 ‘정적인 세계관’에서 형성된 철학이기 때문에 현상을 인식하는 나름의 특성을 갖고 있다. 불교 철학에서 현상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현상으로서 ‘空’ - 프렉털이 아니라 모자이크 구조 -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가톨릭과 달리 來世와 영혼의 존재가 없어, 자신이 ‘전체’라는 깨달음의 삶이 중요하다. 스콜라(가톨릭) 철학에서 부분은, 완전한 神에서 분여(창조)된 피조물로서 인간의 영혼만이 ‘육화한 神’ -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된다고 믿고 있다.

세상이 무엇으로 되어가는 ‘동적인 세계관’으로 현상을 바라보면, 오늘날 우리의  존재가 - ‘하나의 생명권’, ‘압축된 전체’, ‘소우주’, ‘육화한 神’이라는 사실에 놀랍고 환희의 기쁨을 억누를 수 없지만, 때로는 이 경이로운 존재가 죽음으로 모두 잃어버릴까 두려움에 떠는 것도 사실이다. 깨달음을 통해 죽음을 초연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더구나 神을 믿고 來世를 갈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현실은 그렇게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神과 來世에 집착하는지 모르지만, 외면되는 현세에 來世는 불가능하다. 아예 현실에 집착하여 재물을 쌓거나, 후손을 통해 자신의 영속성을 이어간다고 믿는 삶이 더 많이 있다. 또한 강제라도 소유를 철폐하면 당분간은 해방감을 느끼고 평화가 오겠지만, 소유의 철폐가 공유라 착각되어 결국 자멸하고 만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죽음은 동일하고 확실하다. 여기에......... 죽음 외 확실한 공통점은 없는가?

문화, 문명의 흥망성쇠는 아직도 정신권이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약1천만 년 전에 출현한 우리의 조상들이 발꿈치를 들고 평원을 바라보면서 이룩하기 시작한 사회성이, 약5천 년 전에는 오늘날과 같은 ‘본성’과 ‘사회성’이라는 이원성과 善과 惡의 개념이 고착되었다고 보고 있다. 약5천 년 전,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 유역에서 생활했던 수메르 인들이 점토판에 ‘쐐기 문자’로 쓴  - 오늘날 가톨릭(기독교)의 창세기의 원전이라 전해지는 -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당시 인류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來世는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나의 來世이며, 또한 인류, 아니 모든 현상의 來世이다. 오늘날과 같이 학문이 전문적으로 분화되기 전까지 현상에 대한 해석은, 모두 종교와 철학의 영역 이었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계속 ‘정적인 세계관’에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존재 - 來世란 불가능하다. 약40억 년 전, 물질이 단백질을 통해 처음으로 ‘나’를 인식했을 때부터 ‘나’는 연속된 ‘나’일 뿐이다. 붓다는 ‘부처’로, 예수는 ‘육화한 神’으로 깨달은 ‘나’는 미래에 어떤 ‘나’일까?

인류로 탄생한 그 자체가 축복이며, 來世이다.
그만큼 인간은 책임 있는 존재 - ‘압축된 소우주’임을 잊지 말자!


         - 윗글을 모두 다 이해했다고 ‘깨달음’이라 생각 않기를 바랍니다.
           ‘깨달음’은 머리가 아니라 삶, 공유를 통해 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來世를 설명하면 옳겠습니까? -

하느님은 우리가 뒤를 돌아 보면 보이지만, 앞을 보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는 뒤를 돌아 보는 섭리이지, 來世 외 앞을 보는 진보가 못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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