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udium et Spes Pastoral Institute *
 

 

 


 
 
 
 
 
 

 


   

죽음이란 무엇인가?
   정태옥   2015-04-08 13:40:06 , 조회 : 611 , 추천 : 74

'                                    아름다운 이유’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열매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생명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영원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사랑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시작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부활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공부해야 삶이 깊어집니다.

                         고통을 공부해야 삶이 넓어집니다.

                         부활을 공부해야 삶이 영원해집니다.

                         죽을 것 같은 이별이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 되는 것처럼

                         주님 수난은 부활이라는 새로운 시작의 외침입니다.

                          ................................

                          .........................................."


                                                                                              청주교구 엄정본당

                                                                                 박진성 프란치스코 주임신부  



‘꽃과 열매’ ‘삶과 생명’ ‘죽음과 영원’ ‘사람과 사랑’ ‘고통과 시작‘ ’신앙과 희망‘은 ‘수난과 부활’이라는 신앙의 언어가 반복되는 다른 표현으로서, 우리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글은 아니다. 물론 ‘아름다운 이유’에서 죽음과 고통과 來世가 스콜라 철학으로 예수를 해석한 가톨릭신학의 압축된 핵심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신앙인들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의 괴리에서 온다. 예수를 ‘독생 성자 구세주 그리스도’라 세뇌된 신앙이기도 하지만, 신자들 스스로가 신앙생활이 중노동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앙의 노예근성이다. 오늘날 가톨릭(기독교) 신자들 대부분이 ‘꽃과 열매’와 ‘수난과 부활’이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30여 년 전 지식인들에 의해 시작된 서학(가톨릭)이 나름으로 토착화 하지 못하고 스콜라 철학을 맹신함으로써 신앙생활에서 교회와 세속이라는 이중성이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서양인들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자!”라는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 마찬가지로 동양인들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말을 못 알아듣는다. 결국 같은 의미의 언어이면서 살아온 방식과 사고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드린다. 즉 세상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사람 중심 - 부분’이냐? ‘구원 중심 - 전체’(神)이냐? 의 차이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톨릭(기독교)은 그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신으로 매도되어 몹시 배타적이다. 우리들은 그 차이의 공통점이 ‘죽음’이라는 현상 속에 존재하리라 보고 있다.

  

왜 죽음을 공부해야 삶이 깊어지는가? 왜 고통을 공부해야 삶이 넓어지는가? 왜 부활을 공부해야 삶이 영원해지는가? 물론 우리들의 삶 자체가 죽음과 고통과 來世에서 출발하여 그곳으로 종결되기 때문에, 수도자들과 같이 일일이 의식하며 생활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지만, 어떤 동기에서 이 문제에 갑작이 마주칠 때면 당황하여 길을 잃어버리거나, 때로는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우리들의 삶 자체가, 어떻게 액체 휘발유가 바퀴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전환되는가? 자동차의 원리를 몰라도 운전을 잘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하고, 고장 난 자동차에는 정비사가 필요하듯이, 우리들 삶에 방향타를 잡아 줄 존재가 필요하다. 만약 우리 인류가 무엇으로 완성되는 과정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오늘날과 같이 학문이 전문적으로 분화되기 이전 현상에 대한 모든 해석은, 종교와 철학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신앙의 언어를 쓸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는 ‘신앙의 언어’ 보다 구체적인 ‘과학의 언어’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21세기 우리들은 ‘과학과 종교’는 하나의 현상을 인식하는 다른 방향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꽃과 열매’와 ‘수난과 부활’이 같은 의미임을 과학의 언어로 증명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떼이야르 드 샤르댕’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약1천만 년 전,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한 이래 언제부터 인간은 삶과 고통, 죽음과 來世에 관하여 생각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30만 년 전 지구상에 출현하여 약3만 년 전에 멸종한 현생인류의 사촌인 네안데르탈인들의 매장풍습에서 당시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일부 고인류학자들은 약100만 년 ~ 약50만 년 사이, 우리들의 직계 조상으로 여겨지는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불을 이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작은 사회가 형성되고 사회성이 출현하여, 인간의 삶과 고통, 죽음과 來世에 관한 사고의 싹이 트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오늘날 현대종교의 대부분이 수십만 년 전부터 인류에 의해 형성되고 축적된 세계관이며,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정적이 세계관’에서 형성된 철학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날에도 스콜라 철학에서 현상은 ‘불변하는 존재’의 구현으로 인식되며, 불교철학 또한 ‘윤회’가 진화로 인식되지 못한다. 만약 세상이 ‘무엇인가로 되어가는 동적인 세상’이라면 창조와 윤회는 어떤 의미로 다가 오는가?

  

오늘날 생물학에서 ‘죽음’이란 ‘RNA - DNA'의 단백질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아직은, ‘RNA - DNA' 염기서열의 어느 부분이 노화를 촉진하여 ’죽음‘에 이르는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시간문제로 보고 있다. ’죽음‘이 프로그램이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21세기 들어와 분자생물학자들에 의해서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고생물학자들은 생물에서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진화가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백만 種 중에 ’죽음‘이 없는 생물 개체군이 있다. 약30억 년 전에 출현한 일종의 단세포 아메바는 이등분법을 통해 번식을 하기 때문에 ’죽음‘이 없다. 그 덕분(?)에 30억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단세포 아메바로 남아있지만, 이들 조상의 일부는 다른 단세포와 키메라를 통해 오늘날의 식물과 동물의 원조가 되었다. 즉 오늘날 동물과 식물은 단세포들의 ’죽음‘과 키메라 결과물이다. (휴심정 - 벗님글방 -샤르댕 사상 - Chimera 참조)

  

A(아데닌), G(구아닌), C(시토신), T(티민) 또는 U(우라실) 4개의 염기로 이루어져 있는 ‘RNA - DNA' 자체가 물질(단백질)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는 암호로써 인간에게는 약30억 개가 나열되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생명현상‘이란, 바로 ’폐쇄된 영역’ 세포 내에서 물질(단백질)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는 ‘RNA - DNA'의 기능을 의미한다. A - G - C - T(U) 배열의 길이가 種의 특성을 나타내며,  ‘RNA - DNA' 배열의 길이를 담는 그릇(생식세포) 크기의 변화가 개체에서는 ’죽음‘으로, 種에서는 진화로 나타난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붉은 코스모스와 흰 코스모스는 추운 겨울을 넘기기 위해 개체는 소멸되고 씨앗으로 변신한다. 때로는 붉은 꽃과 흰 꽃이 키메라가 되어 분홍색 자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당대에 발생한 ‘RNA - DNA'의 변이는 후대에게만 나타나기 때문에 개체의 소멸(죽음)을 통해 보다 풍요로운 생명의 연속성을 이어간다. 하등생물의 種에서, 개체와 자손의 ‘RNA - DNA’ 염기서열은 거의 동일하며, 고등생물일지라도 ‘RNA - DNA’라는 단백질 프로그램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생물에서 ’죽음‘은 개체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물이 아니다. 해서 자식이 나와 동일한 존재일 수 없으며, 인간에게 ‘죽음’은 그 자체가 끝이다.





DNA - 생명권 공진화의 정점에서 출현한 인류는 개체가 하나의 생명권이다. 인류는, 아직은 한 쪽 발이 ’폐쇄된 영역‘ 생물에 놓여 있으면서, 다른 한 쪽은 ’폐쇄된 영역‘ 밖에서 인간과 인간의 정보의 공유를 통해 자연(생명)환경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로 문화, 문명과 사회성의 출현이다. ‘RNA - DNA' 단백질 프로그램 - 본성에 의해 평화롭게 살아가던 ’동물인간‘이 ’사회성‘이 출현함에 따라 의식과 행동에서 ’본성‘과 ’사회성‘이라는 ’선택의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이 아닌 ’사회성‘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 - ’인격‘을 형성시킬 의무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생물에서 물려받은 인간의 ‘본성’은 단백질로 프로그램 된 ‘폐쇄된 개체성’이지만, 이성, 양심, 정의, 도덕 등은 사회에서만 형성되는 ‘개방된 영역’ 사회성이다. 사회성은 인간과 인간의 정보의 공유, 키메라를 통해 형성된 ‘응축된 생명 에너지’ - 물질도 생명도 아닌 제3의 물질 - 정신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정신은 인간 내부에 저장되어 ‘RNA - DNA’ 단백질 정보로 유전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인간은 ‘생명’이 아닌 ‘정신’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는 존재가 됨으로써, 인간에게 ‘죽음’은 ‘생명의 죽음’이 아니라 정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즉 罪의 출현이다.

  

‘고통’은 ‘부족’에서 온다. ‘부족’이 채워지면 ‘고통’은 사라진다. 따라서 ‘고통’은 행동의 시발점이며 성장과 진화가 멈추지 않는 한, 늘 ‘부족’과 ‘고통‘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부족’이 채워지는 과정에서 선택과 갈등이 유발되어 생물에서는 경쟁으로 비치지만, 인간에게는 善과 惡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본성’에는 善과 惡이라는 비교선택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善과 惡의 발생은 인간의 행동에서 ‘본성’과 ’사회성‘의 선택에서 온다. 즉 인간의 의식과 행동에서 ’사회성‘ 선택이면 善이며, 폐쇄된 영역 ‘본성’이면 惡이다. 惡의 축적이 바로 罪이다. 罪자체가 ‘정신’으로 승화하지 못한 ‘생명’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罪는 곧 ‘죽음’이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기독교) 신학에서 善과 惡의 개념은 구약시대의 ‘神과의 약속’ - 계명과 율법의 테두리를 못 벗어난 고정된 이분법이다. 당시 인류의 의식수준이 ‘정적인 세계관’이었기 때문에 善과 惡의 개념 또한 이분법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동적인 세계관’에서 인식되는 善과 惡의 개념은 진화상에서 인식되며, 따라서 善과 惡은 인간 고유의 현상은 아니다. 우주가 진화함에 따라 善은 현상으로 존재하여 이어지고, 惡은 뒤처져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惡의 축적이 罪로 나타나 개체뿐만 아니라 사회전체에 갈등과 파멸을 가져온다. 즉 罪는 개체에서 출발하지만 그 영향은 사회성을 띤다. 오늘날 가톨릭신학에서 ‘구원관’과 ‘원죄’의 개념이 ‘罪의 사회성’에서 출발한다.

  

善과 惡은 더 善하고, 덜 善하고, 더 惡하고, 덜 惡한 스펙트럼으로서, 덜 善한 것은 더 善한 것에 비해 惡이며, 덜 惡한 것은 더 惡한 것보다는 善이기 때문에 언제나 善과 惡은 고정된 절대 이분법이 아니라 유동적이며 상대적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설령 그가 창녀일지라도 단죄할 수 없는 이유이며, 누구든지 살아있는 동안은 惡과 罪는 언제나 善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에, 일흔 번의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예수께서는 인간의 삶이 ‘본성’과 ‘사회성’이 罪에 의해 분리됨을 인식하였으며, 두 삶이 하나로 통합되는 영성을 강조하셨다. 예를 들면 배가 고파 음식을 먹을 때, ‘본성’과 ‘사회성’ 중 가장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어린이의 ‘오병이어’의 ‘기적사화’와 최후의 만찬에서 밀떡과 포도주의 나눔의 의미에서 예수의 영성을 엿볼 수 있다. 영성은 일찍이 붓다께서는 ‘부처’로, 공자께서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설파하신 ‘불성’과 ‘인성’의 동일한 의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가톨릭(기독교)에서 예수의 부활이 ‘부활 사건 - 기적’으로 신앙되는 이유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동적인 세계관‘이 내재되어 있고, 또한 예수를 해석하는 ’영혼과 육신’이라는 이분법이 ‘정적인 세계관‘에서 형성된 스콜라 철학이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을 모두 알아듣지 못하는데 원인이 있다. 물론 오늘날 ’영혼‘과 ’來世‘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철학에서조차 인간 자신이 ’부처‘라 설파하지만,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은 돌부처 앞에 절을 한다. 이는 인류가 아직도 성장하는 과정이며, 문화, 문명의 흥망성쇠는 정신권이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정신현상‘이라고 하면 개체의 영(靈)에 의한 인간 내부현상이라 인식하는데, 영(靈)은 인류의 ’공동정신 에너지‘로서 개체는 사회유전자를 형성하는 정신소립자로서 선택에 의해 ’사회성 행동‘으로 나타나며, 문화, 문명으로 전환됨으로써 그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무기질 에너지의 ’응축력‘이 100이라면, 생명 에너지는 1억이며, 정신 에너지 - 영(靈)은 1경이다. 때문에 ’물질 - 에너지‘ 순환과정에서 정신 에너지가 만들어 내는 물질은 무기질이나 생명 에너지가 상상도 할 수없는 물질이 생성된다. 인간은 ’생명‘이 아니라 ’정신‘으로 영속되는 존재로서, 우리가 ’인류의 공동정신‘ -영(靈)을 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의 부활‘은 곧 ‘RNA - DNA’에 의한 ‘유전’이 인간에게서 끝났다는 선포이며, ’폐쇄된 삶‘ - 罪의 단절을 요구하는 외침이며, 개체가 아닌 인류 전체에게 보내는 ’영생의 메시지‘ 이다. 바로 오늘날 DNA - 정신권 공진화의 신앙언어이다.

  

‘생명 현상’이 ‘폐쇄된 영역’ 생물체 내에서 일어나는 ‘물질의 생성과 소멸현상’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은 마르크스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가 물질의 생성방식에 따라 발전한다고 봄으로써 ‘유물론 역사’를 설파하였다. 물론 마르크스는 ‘정신은 물질의 소산’이며, ‘물질은 정신의 소산’임을 인식하였지만, 來世는 종교가 만들어 낸 ‘허구’라는 오류를 범했다. 즉 인류의 역사는, 인간으로 부터의 해방사가 아니라 자연(생명)으로 부터의 해방사이다. 다시 말하면 유물론자들이 그렇게 저주하는 神으로 부터의 해방사이다. 그 시발점이 농경의 시작이다. 지금 당장 지구상에서 온 인류가 평등한 세상에서 산다고 해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윤회가 사라지는 세상이 오리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참된 ‘부활의 來世’는 자연(생명)으로부터 완전 해방에서 온다.

삶 ...........

고통 ..............

죽음 ....................

부활 .............................

그 자체가 ‘영원성’으로 이어지는 길이며, 결국 인류의 ‘선택’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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