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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바치는 '정원사'라는 순수 우리말로 교회공동체를 아름답게 다듬고 가꾸자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희망> - 제1부 우리 사회 안에서 희망의 증거 (번역: 오민환)
   기쁨과희망   2020-05-06 11:59:37 , 조회 : 26 , 추천 : 5


  

우리 희망의 내용과 근거를 대라면, 단지 암시와 선택으로만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선택된 내용은 신앙고백의 토대를 형성한 교회의 사도신경(Credo)을 꿰뚫어 볼 수 있기에는 충분하다. 이것은 취향과 자의로 한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시대 안에서 그리고 우리 시대를 위한 사명과 희망에 대한 응답이다. 지금 여기 – 무엇보다 독일연방공화국의 생활세계라는 관점에서 – 필수 불가결한 것에 관해 말하려 한다. 그리고 진술의 선택과 그 구체적 전개가 너무 주관적이지 않도록 주의한다. 우리 생활세계는 이제는 당연히 종교적으로 각인된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이 사회를 지배하는 ‘자명함들’이 종종 우리의 희망에 대해 집단적으로 맞서고 있다. 특히 희망의 메시지와 생활세계 경험의 결합을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삶의 한 가운데에서 마주한 이 희망의 메시지가 더 이상 의미와 위로, 격려가 되지 못할 때, 이 자명함들은 다양하게 자신의 입지를 강화한다. 따라서 우리 희망의 증거로 사회적 삶의 ‘자명함들’이 바른 방향을 잡도록 노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교화시킬 수 없는 자기방어가 아니라, 비판적 자기표현이다. 즉 우리의 증거를 희망의 초대로 바꾸기 위해, 모든 것은 의미와 행동, 정신과 실천의 일치를 지향한다.

1. 우리의 희망이신 하느님

하느님의 이름은 인류의 희망사와 수난사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 역사 안에서 빛나면서 어둡고, 숭배받고 배척되는, 악용되고, 모욕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잊히지 않는 이름을 만난다. “희망의 하느님”(로마 15,13 참조)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탈출 3,6; 마태 22,32)이시고,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시편 121,2)이시다. 과거 희망의 간구를 오늘까지도 계속 지속하듯, 유다 민족과 이슬람교도와 함께 공적으로 고백하는 하느님이시다. “제게 주의를 기울이시어 응답해 주소서. 제가 절망 속에 헤매며 신음하니 원수의 고함 소리 때문이며 악인의 억압 때문입니다. […] 제 마음이 속에서 뒤틀리고 죽음의 공포가 제 위로 떨어집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저를 덮치고 전율이 저를 휘감습니다. 제가 생각합니다. ‘아, 내가 비둘기처럼 날개를 지녔다면 […] 그러나 내가 하느님께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나를 구하여 주시리라”(시편 55,3-7ㄱ; 17). 이 희망의 말을 오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홀로 고립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침내 지금도 여전히 종교사인 인류사에 우리 자신을 지탱하고 신뢰할 수 있는 투표권, 소위 공동결정권(Mitspracherecht)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것이다.

신앙의 하느님은 희망의 근거이지, 실망의 틈을 채우는 분(Lückenbüßer)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자신을 점점 더 단순한 욕구사회(Bedürfnisgesellschaft), 즉 욕구와 그 만족의 그물망으로 이해한다. 사회적, 공적인 관심은 단지 이런 욕구구조로 새겨진 곳에 존재하고, 그리스도교 희망은 그저 실종된 현존재(Dasein)일뿐이다. 여기에서 모든 우리의 희망을 뛰어넘는 어떤 갈망이 표현된다. 순수한 욕구사고의 강제에서 헤어날 수 없는 사람은, “우리 희망의 하느님”을 결국 쓸데없는 현혹, 좌절된 욕구의 상상으로 점철된 충족, 기만과 허위의식으로 비판할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자기형성 역사에서 충분히 간파되었다면서, 희망의 종교를 경솔하게 이미 낡아빠진 위상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희망의 하느님 메시지는 순수 욕구인간, 갈망이 없는 인간, 그러면서 무능하게 믿어서 실제로 위로를 받을 능력도 없고, 타자의 위로를 그저 위안으로 이해하는 인간, 그래서 완전히 신비가 비워진 인간상을 거부한다. 희망의 하느님 메시지는 욕구세계에 인간의 갈망이 전적으로 적응하려는 것을 거부한다.

하느님의 이름은 위험한 사태의 진정을 위한 암호 문자(Deckwort)가 아니고, 고통스럽게 분열된 현실과 성급하게 화해하지 않는다. 하느님에 대한 희망은 우리의 무의미한 고통을 계속 허용한다. 희망은 고통의 의미 없음과 결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희망은 항상 새롭게 의미를 찾고, 모두를 위한, 즉 산 자와 죽은 자, 미래 세대와 현재 세대를 위한 정의에로의 갈망을 일깨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욕망세계의 축소된 척도 안에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번역: 오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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