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udium et Spes Pastoral Institute *
 
 
 
 
 
 
 
 


 



동산바치는 '정원사'라는 순수 우리말로 교회공동체를 아름답게 다듬고 가꾸자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희망>-6. 하느님 나라① <번역:오민환>
   기쁨과희망   2020-10-12 15:01:00 , 조회 : 15 , 추천 : 1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성취 안에 있는 새 인간, 새 하늘과 새 땅을 희망한다. 우리의 희망을 말해주는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무엇보다 예수 스스로 이야기하고 증언한 것처럼, 하느님 나라는 표상과 비유로만 말할 수 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과 자연의 위대한 평화, 사랑의 밥상공동체, 고향과 아버지, 자유와 화해 그리고 정의의 왕국, 하느님 자녀들의 닦여진 눈물과 웃음에 관한 표상과 비유, 이 모든 것들은 정확하며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우리는 이것들을 단순하게 ‘번역’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이를 보호하며 충실히 지킬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욕구 그리고 우리의 계획에 관해서는 말하지만, 우리의 동경과 우리의 희망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 개념과 논쟁의 신비감 없는 언어로 해체시키는 것에 저항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서 더 이상 철회할 수 없도록 시작된 교회공동체 안에서 효력을 드러내는 하느님 나라 약속들은, 그 약속의 고유한 미래 계획, 유토피아와 함께 우리를 생활세계로 이끈다. 그 미래 계획과 유토피아, 또한 과학과 기술 시대, 거대한 사회적, 정치적 전환의 시대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약속들은 시작되고 명료해진다.

우리의 공적 의식이 오랫동안 소박한 발전낙관주의(Entwicklungsoptimismus)에 의해 조율되었던 것은 아닌가? 계몽주의와 기술문명의 진보에서 추정한 발전단계에 저항 없이 자신을 맡기고, 그 안에서 또한 우리의 희망을 소모해버리는 마음가짐으로부터? 오늘날 무절제한 자연지배의 꿈은, 욕구만족처럼 무한히 증가시킬 수 있는 욕구발견의 관심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순수하게 기술지배적으로 계획되고 조절된 인류의 미래에 숨겨진 의심스러움과 은밀한 약속없음을 보다 분명히 느낀다. 미래는 정말 ‘새로운 인간’을 창조할 것인가?

또는 단지 온전히 순응적 인간을 만들 것인가? 공장에서 찍어내듯 나온 규격화된 삶의 표준과 평준화된 꿈을 지닌 인간들, 경이로움이 없는 컴퓨터사회에 둘러싸여, 익명의 강제와 싸늘한 합리성으로 구성된 세계의 메커니즘에 탁월하게 결합한 인간들은 결국 약삭빠르게 적응하는 동물로 양육되었나? 그리고 이 ‘새로운 세계’는 내적 공허, 두려움 그리고 현실도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개인의 운명에서 항상 보여주지 않는가? 성애화(Sexualisierung), 알코올중독, 마약소비는 그 징후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바로 기술과 경제의 약속이 채울 수 없는 애정에로 갈망, 그러니까 그것은 사랑에 대한 굶주림을 의미하지는 않을까?

이러한 물음들은 결코 과학과 기술의 발전 방향에 역행하지 않고, 인간의 품위에 어울리는 생활세계 형성의 특별한 의미를 훼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물음들은 단지 많은 사람을 (정작 과학자들 자신은 가장 적다) 무의식적으로 규정하면서, 그 의식을 사로잡았고 그래서 우리의 희망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약속의 힘(Verheißungskraft),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새로운 인간의 표상과 비유에 들어있는 빛나는 힘(Leuchtkraft)에 눈을 감는 과학과 기술에 맞서 약속의 신앙(Verheißungsglauben)에로 방향을 잡는다.


(번역 오민환)

1975년 독일천주교회의 뷔르츠부르크 시노드 문헌, <우리의 희망 - 이 시대 안에서 신앙고백>(Unsere Hoffnung. Ein Bekenntnis zum Glauben in diser Zeit) 번역문으로, 연재 중입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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