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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바치는 '정원사'라는 순수 우리말로 교회공동체를 아름답게 다듬고 가꾸자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희망>-8. 교회의 공동체성 <번역 오민환>
   기쁨과희망   2021-01-04 10:01:17 , 조회 : 30 , 추천 : 1



  “새 창조”는 처음부터 교회공동체에서 현실이었다(갈라 6,15 이하 참조). 이 교회는 희망공동체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 구원행위의 효력이 발생하는 현재를 함께 찬미하는 주님 추모 (Gedächtnis)는 우리와 세상을 위해, 늘 잠정성(Vorläufigkeit)의 위험한 기억이어야 한다. 교회 자체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다. 어쩌면 하느님 나라는 “교회 안에 신비로 이미 현존”(LG 3)한다. 따라서 교회는 순수한 신념공동체나, 미래지향적으로 결속된 이익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기여를 근거로 한다. 그분의 거룩한 성령은 교회일치의 살아있는 바탕이다. 드높여진 주님의 거룩한 성령은 우리 확신의 가장 내밀한 힘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다(콜로 1,27 참조). 따라서 우리 교회의 희망공동체는 자체로 항상 누군가가 처분할 수 있는 결사체가 아니다. 교회는 공동체 형태 안에서 한 백성이다. 즉 인간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사로서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예배에서 이 역사를 반복해서 찬미하고 이로부터 생명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신원을 확인하고 증명하며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이다.

이 하느님 백성에게 허락된 공동체 경험의 생생함은 당연히 희망 자체가 지닌 생명에 달려있다. 분명 아무도 자신만을 위해 희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은 애매하게 휘어진 확신이 아니고, 타고난 존재낙관주의(Daseinsoptismus)가 아니다. 희망은 자신만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한 관점에서만 희망할 수 없다는 것에서, 근본적(radikal)이고 수준이 높다. 우리만 본다면, 우리는 정말 마지막에는 우울감, 거의 은폐되지 않는 절망, 또는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낙관주의 그 이상으로 남게 될까?

하느님 나라를 희망한다는 것은, 항상 타자의 관점에서 희망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찾는 것이다. 먼저 타자를 위한 희망을 함께 희망하는 곳, 그러니까 우리의 희망이 뜻밖에 사랑과 꼼무니오로 운동을 받아들이는 곳에서, 소심하고 두려움으로 존재하는 것과 이기심을 기약 없이 반영하는 것은 멈춘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14).

살아있는 희망으로 교회공동체의 생생한 모습이 전개될 수 있고, 한편 경험 있는 교회공동체는 생생한 희망을 성숙시키면서, 항상 그 희망을 서로 배우고 축하해줄 수 있는 새로운 자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삶의 모습이 우리 자신과 생활세계의 인간에게 새로운 관계를 충만케 하는 삶을 넓히고, 그래서 점점 커지는 무관계 사회에서 살아있는 공동체의 효소가 될 수 있는 희망공동체의 특징을 충분히 제시하는가?

또는 공적인 교회의 삶은 매우 흐릿해서, 두려움과 우유부단으로 협소해지고, 자신의 관점에 너무 사로잡혀, 도처에 퍼진 무관계와 고립의 형태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확인하고 강화하는 자기보존과 자기복제에 대한 염려에 지나치게 휘둘리지 않는가? 오늘날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회로부터의 탈주운동처럼 공동체의 새로운 형태에서, ‘단체들’에서 그 무엇인가 뚜렷이 나타난다. 확실히 이러한 경향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런 경향에서, 사람 사이의 소통이 여러 갈래로 과도하게 갈려져 조직되며,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의 무관계성을 장려하고, 그 지배의 새로운 메커니즘을 작동시킬 수 있는, 새롭게 인위적 고립과 고독을 만드는 복합적인 사회생활 안에서, 새롭고 풍부해진 공동체의 관계 경험을 동경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많은 생생한 형태의 존재를 알고 있고, 새로운 것을 깨우고 요구하기도 하는 희망공동체의 증인 이상으로, 우리 자신과 생활세계에 빚지고 있다. 여기에는 특히 생생한 공동체 경험을 위한 교회 고유의 관료 조직, 그 경영동반자와 이와 관련한 제도적 강압으로 복무하는 공무원, 또한 의회 구성원과 단체의 대표들은 위험에 주목해야 한다.

즉 많은 이가 오늘날 교회의 관료적 모습에 고통을 받고, 생활세계와 같은 사회적 강제와 메커니즘에 힘없이 내맡겨진다고 느낀다. 그들은 [관료적 교회를] 외면하거나 체념한다. 과거 그 어느 때 보다, 더 결연하게 오늘날 교회 안의 이러한 위험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필요하다.

관료적 특수화와 조직화를 불가결한 직무기능 안에서만 올바로 평가하고, 그 현실적 외양은 변할 수 없는, 하느님이 원하는 교회의 표현으로 치켜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생한 희망공동체의 증거가 조직을 초월한 비인격적 생활세계 한가운데서 구체화할 수 있기 위해, 교회의 삶 안에서 충분히 내적인 감동을 얻게 될 것이다.  

(번역 오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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