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udium et Spes Pastoral Institute *
 
 
 
 
 
 
 
 


 



동산바치는 '정원사'라는 순수 우리말로 교회공동체를 아름답게 다듬고 가꾸자는 의미입니다.


   

72일째 백남기 농성장에서 아침을 맞으며 <김영길사도요한/전주교구>
   기쁨과희망   2016-03-09 10:58:19 , 조회 : 603 , 추천 : 104


‘백남기국가폭력’ 109일째다. 내가 백남기 형님 곁을 지킨 지 72일째. 지난겨울 나의 주된 생활공간이 된 서울 혜화동을 오늘 떠난다. 나는 전문시위꾼도 아니고 전문농성꾼도 아니다. 생명농사지어 다섯 식구 먹고 사는 그냥 평범한 전업 농사꾼이기에 이제 어머니 계신 지리산 자락으로 내려가야 한다. 미루어둔 퇴비도 뿌리고, 나무에 물오르기 전에 가지치기도 해줘야 한다. 뽕나무와 오미자 넝쿨들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땅이 풀리면 둥굴레도 캐어 구수한 둥굴레차도 만들어야 한다. 돼지감자도 캐야하고 할 일이 많다. 가장이 떠난 집에 서생원까지 들어오셨다니 집안 꼴이 어떻겠는가.

농성장을 떠나면서 착잡한 마음이다. 백남기 형님은 저리 누워계시는데 나는 먹고살겠다고 형님 곁을 떠나야 한다니 뒤끝이 찝찝하다. 누구도 나를 붙잡지는 않지만 그냥 그렇다. 뒤를 이어줄 농민들이 없으니 마음이 더욱 무겁다. 유기농민 한결이 아빠와 내가 이곳을 지키고 있기에 굳이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들을 하셨을까? 그러면 이제 둘 다 내려가니까 우리가 비운 자리를 누군가 채워주실까? 며칠 생각이 많다. 아마 100일 즈음부터 그런 듯하다. 우리 시대 백남기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백남기는 무엇인가? 어떤 의미일까?

형님의 가족은 얼마나 외로울까? 두렵고 무섭지는 않을까? 우리마저 떠나고 텅 빌 농성장을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 아프실까? 형님은 11월 14일 왜 그 자리에 나서셨을까? 당신 개인의 먹고 사는 것 때문에? 평생을 대통령 욕만 하고 사셨기에 그 울분 때문에? 나잇값 못하는 전문 데모꾼이라서? 자식이름까지 그렇게 지은 꼴통 진보라서?

함께 긴 시간을 농성장을 지킨 유기농민이 언젠가 열정을 가진 농민 300명이 모인다면 백남기 형님을 저렇게 만든 책임자를 끌어낼 수 있다며 모이자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반응은 냉담했다. 결과는 귀농희망자 1명. 암담한 현실을 만난다. 우리 뒤를 이어서 하루씩이라도 농성장을 지킬 농민이 이렇게 없을까? 부부가 농업에 종사한다 해도 독거 가구가 많고 65세 이상의 노령자가 농사를 짓는 게 65% 정도라 하면 아마 농가수 그대로 100만 농민이 맞지 않을까? 100만 농민중에 1박 2일 농성장을 지켜줄 300명도 없는가?

농성장을 지키는 것은 불안과 외로움 속의 형님 가족을 지키는 거다. 함께 나누자는 거다. 지난 109일간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농민단체가 하나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하나 된 몸짓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나의 견해다. 국가의 농업정책은 농민들의 단결을 철저히 봉쇄한다. 백남기 국가폭력사태는 국가가 농민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것 아닌가? 그가 요구한 것은 21만 원 쌀값보장의 대선 공약을 지키라는 것이었고 밥쌀 수입에 따른 쌀값 폭락에 항의하려 그 자리에 나선 거 아닌가? 농민의 계급적인 이익을 위한 항거였다. 그런데도 친정부성향의 농민단체들은 모르쇠 한다. 이 문제를 농민들의 문제, 농업정책의 문제, 폭압적 국가운영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그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연대로 잇지 못한 우리도 문제이다. 결국 이 백남기국가폭력사태에 맞서 긴 시간 농성장을 지킨 내가 확인한 것은 우리 농민운동의 민낯과 한계인 셈이다.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2014.4.16.” 세월호 관련 416 연대에서 만든 나무 목걸이에 인두로 찍힌 글귀다. 그 뒷면에 농성장을 떠나는 마음을 몇 글자로 적는다. 백남기도 세월호다, 백남기가 예수다, 내가 백남기다.


<김영길 사도요한 / 전주교구, 가톨릭농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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