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udium et Spes Pastoral Institute *
 
 
 
 
 
 
 
 


 



동산바치는 '정원사'라는 순수 우리말로 교회공동체를 아름답게 다듬고 가꾸자는 의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존재-생명-이해 <안셀름 그륀 / 번역: 고영은>
   기쁨과희망   2016-06-08 11:49:12 , 조회 : 759 , 추천 : 99


칼 구스타브 융는 축제에 치유적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축일의 구원론적 관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융에 의하면 하느님 표상은 아주 중요한 원형적 이미지입니다. 원형적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중심, 참된 자아와 함께 위안을 줍니다. 이러한 이미지가 병들면, 온전한 사람도 아프게 됩니다. 융에게는 조화로운 하느님 표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건강이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표상은 융에게는 구원의 이미지입니다. 하느님 표상은 하느님을 붙박아 두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신비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표상은 하느님을 너무 성급하게 어떤 특정한 개념으로 못 박지 않습니다. 이 표상은 모든 이미지의 저편에 있는 하느님을 항상 바라볼 수 있도록 신비를 개방합니다.

그리스 교부들에게 있어 하느님의 본질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개념과 표상 저편에 계신 하느님의 작용을 항상 삼중의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즉 존재(esse), 생명(vivere), 이해(intelligere)입니다. 이 세 근본원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연결됩니다. 성부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순수 존재라는 말입니다. 성자는 활짝 피어나고, 활력이 넘치는 충만한 삶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이해를 의미합니다.

성부는 모든 존재의 원천입니다. 우리를 강하게 이끌기 위해 성부로부터 생명(성자)이 흘러나옵니다. 성령은 이해를 통해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의 길을 함께 걷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또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이해하도록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부로부터 온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 안으로 이끕니다. 성령은 우리를 원천과 연결시킵니다.

이 세 원리를 우리를 위한 의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순수 존재와 함께 위안을 얻고, 단순히 오직 순수 존재라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경험합니다. 안젤루스 실레시우스(역주: 17세기 독일의 신비주의자, 시인)는 순수 존재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장미는 왜라고 묻지 않네. 장미는 그저 꽃이 피기에 피어날 뿐이기 때문에.” 자신을 변호하지도, 무엇인가를 제시하지도 않고 그저 단순 소박하게 존재하는 구원 체험입니다.

이러한 경험에서 – 교부들처럼 – 순수 존재인 성부의 존재를 예감합니다. 우리가 활기차고, 우리 안에서 생명이 요동친다면, 마침내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성자 하느님을 경험합니다. 내 안에서 느끼는 삶의 역동성을 통해 성자를 만납니다. 성자 스스로 내 곁에 그리고 내 안에 계십니다. 나 자신을 이해한다면, 성령이신 하느님을 경험하고, 성령은 내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영혼의 심연에서 그것을 봅니다. 그곳에 명료함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 나 스스로에게 이해를 선사하는 성령을 느낍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표상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 이미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본질에 관한 추상적 사유가 아니고, 생명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고(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느끼고(성자), 이따금 명상의 순간에 모든 존재의 근거를 보고 이해하는(성령)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을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축일을 기념하는 구원 표상이고,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와 우리 자신의 고유한 신비로 이끄는 표상입니다.  

<안셀름 그륀 / 번역: 고영은>

*출처: 2016년(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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