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udium et Spes Pastoral Institute *
 
 

 

 

 

   
   
   

 






'선포와봉사(Kerygma et Diakonia)'는 사제들을 위한 강론길잡이입니다.



   

2014 <가해> 제2권-통권 93권 - 다시 희망을 확인하며
   기쁨과희망   2014-02-04 11:12:18 , 조회 : 774 , 추천 : 97
가해_제2권(93)연중_제2주일__연중_제3주일.pdf (700.9 KB), Download : 22



새해를 맞아 <선포와봉사> 신부님들과 독자들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희망을 확인하며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모두 힘들고 어려울 때 새삼 희망을 되내이며 희망을 확인하곤 합니다.
물론 이집트 노예살이와 바빌론 유배가 고난의 대표적 현장이었고 바로 이 자리가 메시아 꿈과 예언자적 희망이 싹튼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현대사에서 희망의 주제와 희망의 신학이 부각된 때는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겪으면서였다고 신학자들은 술회하고 있습니다. 구체적 예가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입니다. 무죄한 이들이 어이없이 살육 당하는 참상을 지켜보면서도 아무 말하지 못하던 그 절망 속에서 신앙인들은 희망을 간직한 인간의 위대한 힘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현실에서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늘 공존하게 마련입니다. 그 현실 속에서는 대체로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히틀러와 같은 잔학한 자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그와 손잡고 그에 동조하는 무리와 졸개들 이른바 권력층, 정경유착과 권언유착의 무리 등입니다. 두 번째는 이들에게 짓밟히면서 빼앗기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는 약하고 억울한 가난한 이들, 노동자, 농민, 외국인 등과 특히 불의에 저항하는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흔히 말하는 침묵의 대중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합니다. 물론 이 침묵의 대중 속에서도 여러 갈래의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십인십색이라 했으니 어떻게 감히 70억의 전인류를 이렇게 단순히 세 부류로만으로 분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서로 뜻을 모으고 공감대 형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공감대 형성, 그것이 바로 사랑의 작업, 정의의 작업 그리고 평화의 행업입니다. 사랑은 바로 정의와 평화의 합일이며 사랑은 바로 공감(sensus communis)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감이란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합일인 예수님의 강생,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매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끊임없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과정이 바로 성화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 곧 동정(同情 ․ compassio)입니다. 고통을 함께 하고, 고통을 나누고, 고통의 현장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이며 연민입니다.

이를 우리는 탈출기 3장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울부짖고 있는 백성들의 아픔을 보시고, 들으시고, 마음 아파하신 하느님, 그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시어 인간의 길, 해방과 자유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탈출기의 하느님 체험! 모세의 이 체험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원체험입니다. 모세의 이 체험이 바로 성서의 기초이며 성경의 기둥입니다. 그 모세는 노예살이 하는 동족들의 고통을 지켜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동족을 짓밟고 괴롭히는 이집트 군인들을 때려 죽였습니다(탈출 2,12). 그리고 모세는 노예살이 동족끼리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이들을 꾸짖고 말렸습니다. 모세는 이와 같이 삶의 현장에 끊임없이 개입했습니다. 현실에 개입한 모세, 현장을 찾아간 모세, 현장에서 강자를 때려 눕힌 모세, 이 모세의 행업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의 신비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히틀러 시대뿐 아니라 매 시대마다 우리는 세 부류의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면서도 모세처럼 하느님을 체험하고 약한 이웃을 위해 불의한 강자와 맞서 싸우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새해를 맞이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기리면서 바로 그 당대 타락한 조선왕조와 맞서 싸웠던, 청나라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저항했던 민초들의 아픈 역사를 깊이 되새깁니다. 물론 동학농민혁명은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그 정신을 기리면서 우리는 바로 2014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역사적 교훈을 되새깁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우경화와 새로운 침략음모, 미국의 경제적 침투와 아시아 지배에 대한 야욕, 중공의 물량주의적 공세와 제국주의적 군비 확장 등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는 우리 남한의 모습, 그런데 우리 남한은 온통 부정, 불법, 관권 선거를 통해, 불의한 거짓 언론과 손잡고 국민을 속이는 어이없는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기가 막힌 현실입니다. 침략국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사실은 현정권 스스로가 우리 교과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모순을 지켜보노라면 분노보다는 슬픔이 앞섭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정부를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저도 한 시민으로서의 아픔과 신앙인으로서의 큰 갈등을 안고 있습니다.

참으로 못난 우리들입니다. 특히 사기꾼과 같은 정치인들과 사이비 언론인들은 툭하면 북한을 경계해야 한다며 국민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새누리당 졸개들과 현 정권의 실무자들의 그 근원을 찾아 가노라면 침략국 일본과 손잡고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렸던 친일 매국노들입니다. 그리고 미군정에 의존했던 자유당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군부독재의 졸개들이며 늘 남북분단의 열매를 먹고 사는 수구, 반통일 분열분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는 주범이며 정치사회 현실을 뒤틀어 해석하는 조․중․동과 같은 사이비 언론 그리고 이에 기생하는 이른바 정치평론가 무리들입니다. 늘 괴변으로 역사와 현실을 속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도 이와 똑같았습니다. 사실 이른바 당대 상류층을 이루었던 무리들은 사제 가문의 종교인들, 곧 사두가이파와 경건한 신심인들인 바리사이파 그리고 율법학자들과 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침략 지배권력인 로마총독과 때로는 적당히 손잡고 때로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긴장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대 가난한 백성들, 약자와 병자, 목동과 노동자, 여성들을 외면하고 냉대했던 잔인하고 비겁한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온갖 괴변으로 율법을 해석하며 백성들을 괴롭히고 지배했던 무리들입니다. 바로 이들을 고발하며 나선 대표적 인물이 세례자 요한이며 이 기초 위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을 활짝 펼치시고 끝내는 이들 거짓종교인, 거짓정치인, 조작된 여론선동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습니다.

종교인들에게 배척받아 돌아가신 예수님,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사형 확정을 받으신 예수님, 참으로 예수님은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신 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을 잘 믿고 있다고 자처하는 유다종교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것도 로마권력에 빌붙어 조아리며 총독 앞에서 굽실거리고 한자리 얻을까하는 비겁한 자들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모순 말입니다. 이 분을 한스 큉 신부님은 “타살 당한 청년 예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분이라고 그는 선언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화살기도처럼 늘 반복하며 마음에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2013년 3월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뜻밖의 사임 후, 새로 뽑힌 프란치스코 교황은 참으로 신선한 가르침과 선포를 통해 온 세상과 교회를 변혁의 물결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 분의 평범한 언행과 상식적 발언은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라는 복음의 핵심을 우리 모두에게 새롭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언론은 그분의 행업을 ‘혁명적 변화’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혁명적 변화, 그렇습니다. 회개가 바로 혁명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상식으로 기존의 모든 것을 바꾸는 힘입니다. 저는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언론을 통해 대할 때마다 그리고 그 분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을 읽으면서 새로운 힘을 얻고 큰 희열을 느낍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이태리에서는 중세의 메시아라고 칭송합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바로 예수님의 재현이라는 말을 듣고 저는 처음에 다소 생소해했으나, 이태리의 아픈 역사와 그 분의 삶과 행업을 연계하여 공부하면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지닌 위대한 역할을 재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이름을 선택한 새 교황 프란치스코에 대해 저는 요사이 참으로 21세기의 메시아라고 생각하면서 기쁨과 함께 큰 꿈을 지닙니다. 저는 요사이 매일미사 중 교황을 위해 바치는 기도에서, 집중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향이 참으로 모든 주교, 사제, 수도자, 신앙인 안에서 생생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더욱 정성껏 기도 바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과 같이 저도 프란치스코 교황 때문에 큰 기쁨과 희망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이 아직 완역되지 않아, 이 기회에 저는 그 목차만이라도 신부님들과 함께 일별하고, 강론 준비와 사회적 변화를 위해 더욱 노력하고 분발하고자 합니다. 암울한 정치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다시 희망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복음의 기쁨> 목차입니다. 본문은 5장 288항, 224쪽의 분량입니다.

목 차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영어, 이탈리어, 독일어 역본을 참조하였습니다.


      복음의 기쁨(1)
Ⅰ. 늘 새로운, 함께 나누는 기쁨(2-8)
Ⅱ. 복음선포의 기쁨과 위로(9-13)
    영원한 새로움(11-13)
III. 신앙의 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14-18)
    이 권고의 목적과 한계(16-18)

제1장 변모해야 할 교회의 선교적 자세(19)
         Ⅰ. 밖으로 향하는 교회(20-24)
                 당당하게 주도적으로, 개입하고, 동행하며 열매 맺는 기쁨과
     축제의 마음으로(24)
         Ⅱ. 사목적 전환과 회개(25-33)
                 포기할 수 없는 교회의 쇄신(27-33)
         Ⅲ. 복음의 심장, 그 핵심에서부터(34-39)
         Ⅳ. 인간의 한계와 상황을 껴안아야 할 선교(40-45)
         Ⅴ. 교회는 열린 마음의 어머니여야(46-49)

제2장 공동체적 헌신의 위기 한복판에서(50-51)
         Ⅰ. 현실 세계의 몇 가지 도전(52-75)
                 배타적 경제는 안 된다(53-54)
                 돈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우상도 안 된다(55-56)
                 주객이 전도된 자본중심의 지배체제, 이대로는 안 된다(57-58)
                 폭력을 유발하는 불평등을 반대한다.(59-60)
                 몇 가지 문화적 도전(61-67)
                 신앙의 토착화에 대한 도전(68-70)
                 도시 문화로부터의 도전(71-75)
         Ⅱ. 사목자 앞에 직면한 유혹들(76-109)
                 선교적 영성 앞에 놓인 도전 앞에서는, 예(yes)하라.(78-80)
                 이기주의와 영적 침체 앞에서는 아니오(no)라 하라.(81-83)
                 비관적 비생산적 자세는 떨쳐버려라.(84-86)
                 예수 그리스도께 기초한 새로운 관계를 늘 지녀라(87-92)
                 영적인 세상 헛바람에 휩쓸리지 마라(93-97)
                 우리 결코 서로 싸우거나 전쟁하지 말자.(98-101)
                 기타, 교회가 직면한 도전(102-109)

제3장 복음의 선포(110)
         Ⅰ. 하느님의 모든 백성이 복음을 선포한다.(111-134)
                 모든 이를 위한 백성(112-114)
                 다양한 모습의 백성(115-118)
                 우리 모두는 제자요 선교사(119-121)
                 대중 신심이 지닌 복음화의 힘(122-126)
                 인간에서 인간으로(127-129)
                 복음화되는 공동체 안에서의 봉사 은총(130-131)
                 문화, 사상과 교육(132-134)
         Ⅱ. 강론(135-144)
                 전례적 상황(137-138)
                 어머니(교회)와의 대화 같은 강론(139-141)
                 심장을 불태우는 말씀(142-144)
         Ⅲ. 강론 준비(145-159)
                 진리에 대한 경외심(146-148)
                 말씀의 위격화(149-151)
                 영적 독서(152-153)
                 백성의 입장에서 경청하기(154-155)
                 교육적 자료(156-159)
         Ⅳ. 케뤼그마(kerygma)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한 복음화(160-175)
                 케뤼그마와 그 전수를 위한 교리 교육(163-168)
                 성장과정에서의 인격적 동반(169-173)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174-175)

제4장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
        Ⅰ. 케뤼그마의 공동체적 그리고 사회적 울림(반향)(175-185)
                 신앙고백과 사회적 책무(178-179)
                 하느님나라와 도전(180-181)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182-185)
         Ⅱ.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포용(186-216)
                 하느님과 일치하여 울부짖음을 들어야(187-192)
                 전력을 다해 복음에 충실하기(193-196)
                 하느님 백성 가운데에서 가난한 이들의 특별한 위치(197-201)
                 경제와 소득의 분배(202-208)
         Ⅲ. 공동선과 사회적 평화(217-237)
                 시간이 공간보다는 우선한다.(222-225)
                 일치가 갈등보다는 낫다.(226-230)
                 현실이 이상보다는 더 중요하다.(231-233)
                 전체가 부분보다는 우선한다.(234-237)
         Ⅳ. 평화실현을 위한 사회적 대화(238-258)
                 신앙과 이성과 과학간의 대화(242-243)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244-246)
                 유다교와의 관계(247-249)
                 종교 간의 대화(250-254)
                 종교의 자유실현을 위한 사회적 대화(255-258)

제5장 성령 충만한 복음 선포자들(238-258)
         Ⅰ. 새로운 선교적 자극을 위한 동기들(262-283)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세주 예수님에 대한 구체적 만남과 체험
     (264-267)
                 하느님 백성이라는 영적 희열(268-274)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그 크신 신비스러운 힘(257-280)
                 간청기도가 지닌 선교적 위력(281-283)
         Ⅱ. 성모 마리아, 복음화의 어머니(284-288)
                 예수님께서 주신 귀중한 선물(285-286)
                 새로운 복음화의 별이신 성모님(287-288)

목차를 정리하면서 몇 군데는 의역을 했습니다. 다시 새해 축복의 인사와 함께 신부님들의 영육간 건강을 기원하며 건투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1월 5일 주님공현대축일에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가족들과 함께
함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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