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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포와봉사(Kerygma et Diakonia)'는 사제들을 위한 강론길잡이입니다.



   

2014 <가해> 제3권-통권 94권 - 서대문형무소와 사순절 그리고 부활의 교훈
   기쁨과희망   2014-03-28 20:32:41 , 조회 : 688 , 추천 :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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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과 민주구국선언


‘3․1절 95주년과 3․1민주구국선언 38주년 그리고 무죄판결 기념 모임’이 2014년 3월 1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9옥사 앞에서 있었습니다. 1976년 3·1절 미사를 명동성당에서 봉헌한 후 사제, 목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 등 11명이 구속, 7명은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게 된 이른바 ‘명동성당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2013년 7월 13일 재심을 통해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38년만에 이루어진 판결입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목사님들이 주도하여 김대중평화센터, 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한국기독교교회인권센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공동 주최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후원으로 300여 명이 모여 이 행사를 가졌습니다. 열여덟 분 가운데 김승훈 신부님 등 열 두 분이 이미 선종하셨습니다.

날씨는 맑았지만 꽃샘추위와 찬바람으로 야외행사인 관계로 모두들 매우 춥고 힘들었습니다. 이날의 행사는 개신교 등 여러 단체의 많은 분들,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회장단과 성서반, 청구성당, 제기동성당 교우 등이 함께한 교회 일치운동의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이날 저는 3·1절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면서 1970~1980년대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애썼던 모든 분들을 기리면서 감사했고 특히 서대문형무소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면서 조국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감옥에 갇히고 숨져간 모든 순국선열들을 기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는 바로 순국선열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 유관순 열사와 많은 독립지사들의 삶의 흔적을 되새길 수 있는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자리입니다. 거룩한 이곳은 또한 해방과 함께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그 아픔과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통일을 지향하며 실천하다가 갇히고 많은 분들이 숨져간 곳입니다. 또한 이곳은 민주주의 실현과 인권 회복을 위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불의한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며 몸 바친 청년학생, 시민, 노동자, 농민, 지성인, 문인,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 종교인 등 각계각층의 수많은 의인들과 민초들이 갇혀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당했던 골고타 언덕 십자가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또한 선열들과 의인들, 조봉암 진보당 대표, 이른바 인혁당 관계인사 여덟 분, 유신의 핵 박정희를 제거한 김재규 장군 등 여섯 분의 의인 동지들이 목숨을 빼앗긴 죽음의 골짜기, 눈물의 현장입니다. 서대문형무소는 참으로 민족자주독립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곳, 민주주의와 인권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무대, 통일과 평화를 염원하며 두 손 모아기도 바치고 의인들의 희생을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치는 경건한 제단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날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발자취와 삶을 마음에 간직하며 특히 감옥에 갇혀 있던 청년학생들과 우리 사제들을 위해 애쓰고 기도했던 사랑하는 모든 교우들과 수도자들, 동료사제들과 벗들 그리고 동지들께 감사드리며 묵상했습니다. 새삼 ‘모든 성인들의 통공’(Communio Sanctorum), 그 의미를 되새기며 시공을 초월해 하늘과 땅, 과거와 현재, 미래와의 일치와 압축을 확인하며 화살기도를 올렸습니다. 전율의 순간, 전율의 체험이었습니다.

1975년 4월 베트남의 공산화 통일로 크게 당황한 박정희는 이를 악용해, 그해 5월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고 유신체재에 대한 일체의 비판과 언급을 금하며 언급 자체만으로도 감옥에 가두었던 매우 살벌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이에 우리 사제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숨만 쉬면서 그래도 매달 모여 시대를 분석하며 시대의 징표를 확인하곤 했습니다.

해가 바뀐 1976년 새해를 맞아 우리는 1월 23일 개신교 목사님들과 함께 원주에 모여 일치 운동의 지향으로 기도하고 시대를 진단하며 폭력과 독재의 시대가 멈추어야 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구속자들의 석방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지향으로 기도하며  3·1정신으로 노력하자는 김승훈 신부님의 강론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어 문동환 목사님이 “모세는 죽을 때 나이 120세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아직 정기를 잃지 않았고 그의 정력은 떨어지지 않았다”(신명 34,7)는 말씀을 주제로 여호수아에게 모든 권한을 승계한 모세의 아름다움과 위대함, 그리고 그의 겸허함을 예찬하며 설교하셨습니다. 때문에 120세의 나이에도 모세의 눈은 정기를 잃지 않고 맑았음을 성서작가가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독재자 박정희는 자신의 한계를 망각한 채 감히 영구집권을 획책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추하고 비겁한가라고 꾸짖었습니다. 그 후 이우정 교수님이 ‘3·1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습니다. 그 원문을 전해 받은 저는 그 문건을 소각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문건 자체를 간직할 수 없었던 살벌한 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미사와 행사를 마친 후 교우들은 모두 귀가했습니다. 이것이 이날 행사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3·1민주구국선언 서명인 가운데에는 그날 연금당해 미사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김대중씨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국경일인지라 저녁에 쉬고 있던 박정희가 비서들을 통해 김대중씨 등이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이에 그는 기절 할 정도로 화를 내며 “전원 구속해” 이렇게 불호령을 내렸답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설명을 덧붙이지 못한 채 그 다음날부터 그날 미사를 봉헌한 사제들과 함께한 목사님 등을 모두 차례로 중앙정보부로 끌고 가 조사를 하고 1976년 3월 10일에 이들 모두를 국가전복내란 선동으로 구속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무리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보고만 듣고 끝냈으면 그만일 사건을 박정희 스스로가 흥분하여 오히려 국제적 사건으로 비화시켰던 것입니다. 미사 봉헌한 이유로 사제들을 구속했으니 이게 말이 되는가 하고 전국의 사제들이 들고 일어나고 목사님들을 구속했으니 개신교권에서 뭉쳐 하나가 되고 법조인, 교수 등을 구속했으니 이들의 동료들과 가족들이 나서고 김대중씨를 구속했으니 이것은 그야말로 정치적사건 그것도 국제적 사건이 되어 그렇지 않아도 1973년 8월 일본 동경에서의 김대중 납치사건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정부와 시민단체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고 유럽과 미국 등 서방세계 그리고 국제 엠네스티 등이 크게 외치니 명동성당의 미사가 전 세계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우리 사제들은 이를 하느님의 기묘한 섭리라고 고백했고 안병무 교수님은 ‘사건의 신학’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재판이 시작되자 중앙정보부는 사제들을 이 사건에서 분리하여 석방하고자 계획했었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의평화위원회 변호사들과 특히 이돈명 변호사님은 서대문 감옥을 찾아 오셔서 우리 사제들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불구속 조건을 수락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에 신현봉 신부님, 문정현 신부님 그리고 저, 셋은 재판과정에서 도저히 감옥에서 풀려날 수 없게 유신체제에 대한 정면 반대 발언을 하면서 재판에 임하기도 했습니다.

감옥살이가 힘들긴 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제2의 신학교, 영성수련소라고 생각하며 정화작업과 함께 보속에 충실하고 무엇보다도 감옥에 와서 먼저 고생하고 있던 청년학생, 시민 등 의로운 동지들과 함께 있다는 ‘동고’(compassio)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신학의 큰 교훈과 특히 예수님과 성모님 고통의 상통성, 관념으로만 생각하고 고백했던 내용을 현장에서 새롭게 체험하면서 큰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이를 저는 감히 은총의 체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38년이 흘렀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일제침략 36년을 매우 긴 세월로 생각했고, 먼 옛날일로 생각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36년은 바로 우리 당대에 한 시기입니다. 일제 36년, 자신과 민족을 배반한 친일행적의 주범들과 후손들이 버젓이 행세하고 있는 어이없는 이 현실, 4․19를 민주혁명이라고 공적으로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재자 이승만을 예찬하고 있는 어이없는 이 모순, 박정희 유신독재의 졸개들과 그 딸이 판을 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지금, 5·18광주비극의 진상을 밝히지도 못하고 전두환과 부하들이 건재하고 있는 오늘, 여전히 지금도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보안사, 기무사, 검찰, 경찰, 사법부 등의 불법이 반복되고 국제서류까지 조작하며 간첩을 만들고 있는 국가정보원, 참으로 땅을 치고 통곡할 일입니다. 이를 하늘에서 지켜보실 선열들께서는 ‘어떻게 내 나라 내 땅에서 일본 침략자들보다 더 큰 범죄를 저지를 수 있겠느냐?!’고 하늘에서 호통치시며 꾸짖고 계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민족의 꿈이며 과업인 통일을 도박판의 ‘대박’이라는 막말로 뇌까리는 자가 있으니 이것은 민족에 대한, 선열들에 대한 그리고 통일에 대한 모독입니다. 통일은 우리의 꿈, 우리의 기도, 우리의 정성, 우리의 친교, 우리의 합일, 우리의 완성입니다. 통일을 도박판으로 끌고 가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진저!

이렇게 이날 우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3·1정신을 기리며 선조들과 동지들의 뜻을 되새겼습니다. 서대문형무소는 참으로 귀중한 민족의 십자가입니다.


서대문형무소의 세계 문화유산 등재 시민모임

또한 저는 지난 2014년 2월 23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교육장에서 ‘서대문형무소 유네스코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시민모임’ 발족과 심포지엄에 참석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침략국 일본이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개소하여 1945년 해방까지 국권회복을 위해 싸운 독립투사들을 가두고 고문하며 또 많은 분들의 목숨을 앗아간 곳입니다. 해방이후에는 1987년까지 민족통일과 민주화운동관련 인사들을 수감하는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안고 있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1987년 전두환 시절,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과거의 아픔과 그 극복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자 1998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개관하여 지금은 자주독립정신과 민주주의, 인권, 평화통일의 이상을 기리는 교육현장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날 심포지엄 첫 주제 발표에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독립과 민주, 고난의 상징, 서대문형무소’란 주제로 일본의 반인륜적 무자비한 침략 정책과 독립투사들을 탄압한 과정을 역사적으로 자세히 기술하여 발표했습니다. 특히 그는 침략국 일본이 대한제국 자주독립 의지의 상징인 서대문 독립문 옆에 바로 대규모 현대식 감옥을 건립했다는 점을 직시해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일제는 독립지사들을 이곳에 가두고 고문하고 처형함으로서 독립정신과 항일의지를 꺾고자 했습니다. 이에 서대문형무소는 의병투쟁-독립전쟁-통일정부수립운동-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이들과 민족적 양심과 대의로써 싸우다 투옥되고 희생된 고난과 영예의 상징임을 그는 역설했습니다.  

두 번째 발표에서 허권 세계유산도시기구 아시아·태평양지역 사무총장은 ‘서대문형무소의 문화재, 국제인증 방향’이란 주제로 세계 보편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유네스코의 유산 지정 목록은 여섯 개이지만 문화국과 함께 자연유산 커뮤니케이션 부서에도 독자적 사업을 펼치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유네스코 이외에 국제식량기구(FAO)도 국제 중요 농업 유산목록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그는 세계유산과 세계기록유산 현황을 제시하면서 대표적으로 남아프리카 남단 로벤섬이 세계유산이 된 것은 얼마 전에 서거한 만델라 전 대통령이 갇혀있었던 곳 때문만이 아니라, 그 로벤섬의 역사적 발자취와 교훈, 네델란드와 영국이 식민지 수탈과정에서 본토 원주민들을 가두고 압박했던 현장을 잘 보존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서대문형무소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치밀한 준비와 차분한 논리와 설명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특히 최근에 일본이 가미가제 문서 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에 우리 한국인들은 반사적으로 반감을 갖고 분노하며 규탄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감정적 논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제시한 근거는 전혀 그렇지 않고 과거 봉건주의 사회에서 탈피하여 현대화 되는 과정의 의미를 역사적, 문화적으로 잘 접근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대문형무소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서는 차분한 자세로 오랜 기간 자료를 모으고 또한 보편적 가치를 확보하여 세계인들을 설득하고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세계유산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진정성, 완전성, 보존관리 계획이 잘 설정되어야 하는데 서대문형무소의 경우, 현재 전체 건물이 보존되어있지 않고 대부분 헐린 채 일부분만 남았다는 것이 큰 걸림돌이라는 것입니다. 이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원형복구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날 이 설명을 들으면서 역대 독재정권의 당사자들이 그들의 반인륜적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감옥과 고문현장 등을 모조리 없애려 했던 저의를 생각하며 마음이 매우 아프고 분노가 솟구쳤습니다. 이들이 바로 침략국 일본의 재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남산의 중앙정보부, 그 고문현장을 없애고 서빙고의 보안사 등 여러 수사 밀실들을 없앤 독재자들의 범죄를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허권 총장은 서대문형무소라는 외관 뿐 아니라 문서 등의 기록 유적들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할 수 있음도 설명하면서 알차게 차근차근 잘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또한 서대문형무소의 유산적 가치는 첫째로 1908년 경성감옥,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개칭되면서 수용인원 3천명 규모의 큰 감옥으로 확장된 점과 수많은 독립투사를 일제가 구금하고, 고문, 사형 집행했다는 장소로 20세기 초 동아시아 식민 역사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라는 점을 예시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1945년 해방 후에는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으로 개칭되면서 수많은 사상범과 정치범들을 가두고 그들 중 또 많은 이들을 처형한 장소로서 동서 냉전시대와 민주주의 운동의 산 증거임을 제시했습니다.

등재추진 방법으로는 첫째, 구체적으로 서대문형무소의 완전성과 국제적 비교 탁월성 등이 미약하기 때문에 식민시대의 유산이라는 더 넓은 관점에서 몇 개의 유산을 묶어 신청하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라고 말하면서 예를 들어 임진왜란 병자호란시절 경상, 전라, 충청, 병영성, 수영과 함께 동시대 대표적 일제 때의 성곽들도 포함하고(연속유산) 그리고 근대식민지 유산인 일제잔재 유산을 포함하여 신청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습니다. 731부대와 함께하는 중국과의 국제적 연대 가능성도 제시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수난과 수탈 그리고 독립에 관한 자료들을 고문서로 정리하여 국사편찬위원회와 독립기념관과 해외 문서 등을 종합하여 제시하는 방법도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세 번째로 엄수용 문화진흥원이사장은 두 발제의 설명을 전제로 하면서 특히 현실 정치적 측면에서의 고려사항을 제시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민단체가 주도한 점은 훌륭한데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바른 역사관과 민족사관, 민주주의 사관을 종합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친일잔재와 독재 잔재가 여전히 엄존하고 청산되지 않은 한계적 상황에서, 특히 정부당국의 권력자들과 기성세력의 민족사관과 민주주의관이 분명히 정립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직도 교과서 논란 등으로 혼란한 이 시기에 서대문형무소에 대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그는 서울시와 함께 공동으로 주도할 것을 진지하게 권고했습니다.

이날 민족문제연구소 등 많은 시민단체들은 이러한 뜻을 모아 서대문형무소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3·1절을 이제는 3·1혁명이라 부르자

2019년은 3·1혁명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에 지난 2월 26일 프레스센터에서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결성식과 95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교과서에서 3·1운동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역사학자 등 많은 전문가들이 3·1혁명으로 불러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3·1혁명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좀 어색하고 낯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혁명이라는 당위적 설명을 듣고 나서는 이해가 되었고 특히 이날 기념학술회의의 강연을 들으면서 3·1혁명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날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만열 교수님의 기념 강연은 간결하고 분명했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3·1운동은 3·1만세운동, 3·1독립운동 또는 3·1혁명, 3·1대혁명으로도 불리었었습니다.

그런데 3·1운동으로 부르게 된 결정적 배경은 1948년 제헌헌법 제정과정에서 이승만이 3·1혁명과 3·1항쟁이란 표현에 대해 반대하고 오히려 3·1운동으로 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3·1혁명의 시대적 의미를 이만열 교수는 국내적으로는 항일독립투쟁, 그리고 세계사적으로는 중국 북경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5·4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 둘째로 3·1독립운동이 인도 국민회의에 비폭력운동과 인도차이나반도, 필리핀, 아랍지역의 독립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예시했습니다. 특히 이만열 교수는 3·1정신의 재정립으로 무엇보다도 자주정신, 민주정신, 평화통일정신을 거론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끊임없이 항일투쟁정신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자주정신 때문이며 자주민은 민주주의적이고 다수의 합의에 이루어지는 공화제를 지향하면서 3·1혁명의 열정으로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 구체화되었다는 것입니다. 1919년 4월에 수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3·1선언의 결정적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은 3·1혁명을 계기로 확연하게 들어났으며 그 이전과 이후를 구분할 수 있는 경계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3·1독립운동이 그 경계선이라면 독립자주운동과 평화운동과 함께 우리민족사에서 가히 혁명적인 변화라고 일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3·1선언은 대한제국이라는 봉건적 왕정체제를 넘어 이제는 백성 곧 민(民)이 주인이 된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제국이 끝나고, 민국 곧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3·1혁명입니다. 역사의 진전된 새로운 해석과 함께 신선한 민주공화주의를 노래합니다. 혁명적인 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 중턱에서

사순 제3주일입니다. 제1독서의 탈출기에서 우리는 마싸와 므리바라 사건, ‘주님께서 우리가운데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라며 주님을 시험했다는 그 곳, 호렙의 바위가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왔다는 기적이야기, 은총의 체험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3천여 년 전의 사건이 바로 오늘 이 시간에도 재현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라고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성서작가의 고민은 단순히 하느님의 존재만을 문제 삼은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더욱 구체적으로 ‘지금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라는 문제를 안고 씨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객관적으로 존재하시는가’와는 별개로 우리는 바로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확인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느 날 노년 사제들이 병상에서 주고받는 이러한 유형의 대화를 듣고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한분이 “정말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한분이 웃으면서 “그렇다고 해야 하지 않겠어! 이제까지 그렇게 믿고 살아왔는데… 아니라면 너무 허무하잖아!”라고 답하면서 두 분이 함께 웃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자리가 목숨을 건 결단의 자리, 신앙을 고백해야 할 재판정의 자리라면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노사제 두 분은 분명히 순교의 길을 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숱한 순교자들은 목숨을 걸고 하느님을 증거한 분들입니다. 목숨을 걸었다는 것은 바로 그 당대 정치, 권력에 맞서 저항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속죄의 시기인 사순절은 바로 순교자들의 행업과 함께 목숨을 건 결단의 선열들을 기리며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되새기는 때입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 때 우리는 오히려 죽는 편이 더 낫겠다고도 말합니다. 고통의 극치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히브리 백성들의 사막에서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날 성서를 읽고 배울 때 ‘아니, 어떻게 히브리 백성들은 하느님의 그 큰 은혜를 받고도 그렇게 쉽게 밥 먹듯이 하느님을 배신하고 또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며 늘 의아하다고 생각한 때가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서의 실존적 해석을 배우고 익히면서 성경 얘기는 결코 과거의 단순한 얘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사는 너와 나의 이야기란 점을 직시하고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언급된 대사제, 사두가이, 바리사이, 율법학자들도 단순히 예수님 당대의 얘기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이에 저는 ‘어떻게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에 대해서도 이제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을 사는 나와 그리고 우리가 모두 하느님을 외면하고 원망한 히브리 백성이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한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같은 위선자들임을 깨닫고 고백할 때 성서 말씀이 비로소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내게 새롭게 다가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요한복음 4장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도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숱한 사마라아 여인을 만나면서 그분들과 대화를 주고받습니다만 참으로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 여인과 구체적으로 깊은 대화를 나누었듯이 나도 사제로서 내가 만나는 그 이웃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깊은 대화를 나누었는가를 반성하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우선 여성을 경시했던 당대에 예수님께서 과감하게 여인에게 물을 청하면서 여인과의 대화를 심화시켰다는 사실, 그리고 그 여인은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부끄럽다고나 할까, 그 당대 죄녀의 신분으로 모두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그 여인의 내면에 영향을 주시면서 그 여인과 그 동네 사람들 모두에게 큰 관심과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계십니다.

사제로서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웃과 만날 때 이웃과 대화할 때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방법을 구체적으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사순절 중턱에서 저는 신앙인인 우리가 때로는 사마리아 여인을 외면했던 미숙한 유다인들처럼, 민족사를 외면했던 부족함을 생각하면서 신부님들과 함께 우리의 구체적 현실, 그리고 선열들의 얼이 되새겨진 서대문형무소와 3·1혁명의 민족사적 교훈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듯이 우리도 신앙 안에서 서대문형무소, 3·1혁명 그리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구원의 역사, 성경은 바로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역사와 현실과의 끊임없는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향한 길입니다.

신부님들의 영육간 건강을 기원합니다. 십자가를 확인하고 부활을 확신하면서 신부님들의 건투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3월 11일
                  사순절 첫 주간에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가족들과 함께
                  함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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