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udium et Spes Pastoral Institute *
 
 

 

 

 

   
   
   

 






'선포와봉사(Kerygma et Diakonia)'는 사제들을 위한 강론길잡이입니다.



   

2015 <나해> 제1권(통권 98권) - 첫 강론, 마지막 강론..유일한 강론의 열정으로
   gaspi   2014-12-01 17:51:33 , 조회 : 738 , 추천 :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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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강론, 마지막 강론,
유일한 강론의 열정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은 21세기 초 가톨릭교회의 큰 사건이며 동시에 세계사적 사건입니다. 한 사람의 열린 마음과 자세가 교회 안팎에 이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매우 기쁜 일입니다.



베네딕토 16세의 아름다운 사임을 기리며

한편 우리는 이 기회에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사임을 높이 평가하며 기억합니다. 나치 히틀러를 찬양한 소년단 출신이라는 불미스러운 과거가 드러난 그는, 어쨌든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날 때까지는 나름대로 합리적 신학자로 활동하며 긍정적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공의회 개혁을 주도한 신학자들이 주축이 된 󰡔콘실리움󰡕(Concilium) 잡지 편집위원에 불참하고, 1968년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불붙은 유럽 전역에서의 학생운동의 폭력적 대응을 목격하면서 그는 자기 나름의 분명한 이른바 수구 보수적 노선을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그는 바티칸의 관변신학자가 되어 일약 대주교, 추기경, 신앙교리성 장관을 거쳐 교황으로까지 선출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때의 바티칸의 신학 노선은 모두 그가 주도 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는 이때 보프를 비롯한 해방학자들과 여성신학 사조와 종교다원주의 등 진취적 신학운동을 모두 배척했습니다. 그 특유의 신학 이론에 기초하여 그는 궤변에 가까운 신학적 주장도 펼쳤습니다. 때문에 요셉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임 될 때, 한스 큉 신부님은 ‘이는 재앙이다’라고 논평했습니다. 사실 베네딕토 교황시절 전세계 가톨릭은 암울했습니다. 바티칸 관료체제와 함께 전 세계 가톨릭은 거의 침체 상황에 있었습니다. 바티칸은행은 범죄집단과 비리 은신처로 세계언론의 뭇매를 맞고, 주교와 사제들의 이른바 성추행사건은 온 세계를 경악하게 하고 이에 대해 우리는 지금까지도 계속 몸 둘 바를 모른 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교회론에서 우리는 교회를 ‘거룩한 죄녀’(sancta peccatrix), 또는 ‘정결한 창녀’(casta meretrix)라고 묘사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에 기초한 예수님의 정배인 교회 공동체를 거룩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구성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는 죄인들의 모임이기에 우리는 또한 겸허하게 죄인과 매음인이라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과정을 통해 교부들이 고백한 보편적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죄인으로서 우리 자신과 교회 공동체를 겸허하게 하느님께 고백하며 늘 가슴을 치며, 옷이 아니라 심장을 찢는(요엘 2,13) 회개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2013년 2월 베네딕토 16세의 사임(당시 85세)은 바로 한계를 절감한 그가 하느님과 역사 앞에 겸허하게 손을 들고 항복한 결단으로 아름다운 회개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사임을 통해, 교황직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았고, 그 때문에 그는 과거의 모든 허물과 잘못을 넘어, 가장 아름답고 신선한 교황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의 일생 중 아름답고 가장 잘한 큰일이 바로 교황직 사임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환호할 때마다, 이러한 교황이 나오도록 길을 열어준 베네딕토 16세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선한 행보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매우 신선했습니다. 형식적 전통과 관례를 깨고 넘어선 철저한 신앙인인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하느님 앞에 한 죄인이라고 겸허하게 고백했습니다.

인간적인 것이 가장 아름답고 하느님과 가장 가깝다는 희망의 신학명제를 재현한 분입니다.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고 또 무엇보다도 지난 8월 14일부터 4박 5일간의 한국방문기간 중에 우리가 직접 현장에서 또는 TV를 통해 확인한 내용입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분의 첫 강론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교황으로 선임되어 바티칸에 모인 수많은 군중에게 인사하며 첫 강복을 주는 그 감격의 순간에 그는 군중들에게 머리 숙여 주님께서 자신을 축복해 주시도록 침묵 중에 기도를 청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제로서 모두 미사를 봉헌하기 전에, 신자들에게 강복을 드리기에 앞서 이러한 마음으로 신자들의 기도와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는 어설프게도 대단한 직위를 지닌 관료처럼 교우들 앞에서 오만 당당합니다. 그 오만함을 쓸어 없애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3월 14일, 교황으로 선임된 그 이튿날 아침, 추기경들과 공동미사를 봉헌하면서 그는 여럿 중의 하나, 곧 첫째이지만 언제나 동등하다는(primus inter pares) 교황직과 주교사제직의 핵심적 동등성을 늘 간직하고 기도하며 강론에 임했습니다. 군림하고 돋보이는 교황이 아닌 참으로 추기경 중의 하나, 하느님 앞에 평등한 형제로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날의 강론은 걸어가자(camminare), 세우자(edificare), 고백하자(confessare)라는 세 말마디가 주제어였습니다.

저는 그날의 강론에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십자가를 강조한 대목이었습니다. 그 후 강론 원문을 확인하면서 교황강론의 특징을 확인했습니다. 그날의 1독서는 이사 2,2-5절; 2독서는 베드 2,4-9절; 복음은 마태 16,13-19절로 그는 1독서에서 ‘걸어가자’, 2독서에서는 ‘세우다’, 복음에서 ‘고백하다’를 주제어로 선택하며 연결해 강론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각 독서에서 꼭 주제어(key word)를 선택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연계된 십자가 부문에서 그는 그날 이렇게 강론 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십자가는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십자가는 저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십자가 없이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십자가 없이 걸어가고 십자가 없이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세상의 속인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교, 사제, 추기경, 교황일 수 있지만, 주님의 제자는 결코 아닙니다.”

우리 중에도 이렇게 강론하는 사제들이 꽤 있기는 하지만, 보통 대부분의 사제들은 주일 강론의 경우 복음만을 중심으로 강론을 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주일미사는 열정과 생동감이 결여된 미사일 때가 많습니다.
이에 저는 오늘 「선포와 봉사」 신부님들과 함께 강론 준비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복음의 기쁨」을 되새기며

<교황 프란치스코는 바로 1년 전에 「복음의 기쁨」 사도적 권고를 발표했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그가 이제까지 살아 온 사제적 삶의 종합이며 결산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이제 보편교회 공동체의 대표로서 자신의 삶을 전 세계 사제들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5장으로 구성된 「복음의 기쁨」은 제1장 교회의 선교적 변모, 제2장 공동 노력의 위기 속에서, 제3장 복음 선포, 제4장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 제5장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 등 모두 288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제목 그대로 복음을 중심으로 기쁘게 살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제1장은 그렇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제 자신 곧 우리 교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변해야 함을 술회하고 있습니다. 변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회개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어떠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제2장은 이 현실에 대한 진단입니다.

그리고 제3장에서 그리스도인과 특히 사제들이 복음화를 위해 해야 할 일 그것은 바로 하느님 백성 모두가 바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족과 문화의 다양성 안에서도 언제나 변치 않는 보편적 신앙의 가치를 추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인십색이지만 각자 자기자리에서 하느님과 성경 말씀을 수렴하고 녹여야 합니다.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는 강론으로 확인되는데 사제의 일차적 사목 책무가 바로 강론에 있음을 교황은 자신의 사제적 삶을 기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줄 수 없다’(Nemo dat quod non habet)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명제를 떠 올리며, 교황이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의 성실한 사제적 삶에 기초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제4장은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으로 이 세상 현실에서 교회 공동체와 사제가 더욱 투신하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복음화란 이 세상 모든 영역,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현장 등에서 재 강생하여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는 노력이며 과정임을 술회하며 철저한 사회적 투신을 재촉합니다.

제5장은 결론과 종합으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역동적 삶이 바로 부활이며, 그것이 성령의 활동임을 고백하고 복음화의 귀감이신 성모 마리아를 묵상하며 맺고 있습니다.  


강론이란 과연 무엇인가

오늘 나해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저는 제3장 복음 선포 대목을 주의 깊게 고찰하고자 합니다. 「선포와 봉사」 신부님들과 독자들은 이미 이 지침에 따라 잘 실행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러한 기회에 다시 함께 종합하고자 합니다.

저는 「복음의 기쁨」을 일별하면서 빠울로 프레이레의 󰡔민중교육론󰡕과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창시자인 메르시에 추기경 그리고 해방신학자들의, 성서에 기초하여 현실을 관찰(to see) 판단(to judge) 실천(to do/to act)하라는 3단계 선교 방법과 상통한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복음의 기쁨󰡕 1장과 2장은 교회와 현실을 관찰하고 식별하는 첫 과정이며 3장은 바로 복음을 기초로 현실과 역사를 잘 판단하여 새로운 길을 찾고 제시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4장은 현장에서의 투신과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 실현을 위한 사제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책무, 이웃 종교와의 관계와 평화 지향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의 사제적 삶을 종합하여 「복음의 기쁨」을 저술했듯이 우리는 모두 사제로서 각자 나름의 사제적 삶을 종합하고 고백하는 각자의 ‘복음의 기쁨’을 저술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기쁨」을 살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큰 자극과 꿈을 간직합니다. 특히 그 가운데에는 강론과 강론준비 부분은 우리 사제들이 반복하여 읽고 되새겨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강론이 바로 복음 선포의 핵심적 방법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연계점, 곧 가교 역할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강론은 성서말씀이 전례집전 사제를 통해 장엄하게 선포되며 해석되는 순간입니다. 강론은 바로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가 복음을 선포하는 핵심입니다. 말씀의 전례에서 최선을 다해 강론한 사제가 바로 비로소 성찬의 전례에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을 아름답게 재현하고 완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 말씀 안에 계신 예수님

<저는 개인적으로 1961년 대신학교 시절 대림 첫 주일 전야 말씀의 전례에서 큰 놀라움과 함께 성경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를 위해 온 교회 공동체가 기도하고 변혁을 지향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서울 대신학교에서 우리는 이러한 세계사적 변화를 잘 감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 구체적 실례를 보여주기 위해 당시 인천교구에서 사목했던 메리놀회 설신부님이 대림전야 말씀의 전례를 집전하면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는 바로 한 짝이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우리는 늘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고 성체조배 등에 집중했었는데 설신부님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똑같이 성경 말씀 안에 내재하신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당시로서는 너무 놀랍고 새로운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말씀의 전례 때 십자가를 앞세우고 초를 든 두 복사들과 향로 잡이 복사들 그리고 부제들과 함께 신부님은 성경 독서책을 높이 쳐들고 성당 뒤에서 제대 앞으로 입장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행렬을 처음 본 우리 신학생들은 낯설고 이상했지만 말씀의 전례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성경 말씀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새롭게 깨닫게 된 첫 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톨릭인들은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장엄하게 고백하고 개신교인들은 성경말씀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크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체와 성경말씀이 바로 한 실존의 양면이며 사실 성체성사도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이 사실에서 우리는 성경말씀의 생명력과 그 말씀을 선포하는 사제 강론의 중요성을 새삼 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일하던 한 분이 삼성병원의 개원 초창기 의사로 한국에 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한국 사제들의 인상은 너무 권위적이고 오만하다고 느낌을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묵묵히 씁쓸한 웃음으로만 답했습니다. 얼마 뒤 그분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부님, 한국사제들은 책을 안 읽고 연구를 잘 안하시는 것 같아요. 어느 주일 저녁에 제가 동료들과 등산모임에 갔다가 저녁미사를 위해 근처 한 성당에 들렸는데, 도대체 사제가 그날 무슨 강론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심이 많이 들었습니다. 미사 후에 교우들이 신부님께 다 인사한 후 저도 기다렸다가, 신부님을 찾아가 따로 인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다음과 같이 정중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 성무에 매우 바쁘겠지만 주일미사 강론을 더 집중해서 잘 준비했으면 합니다.

이렇게 많은 교우들이 한주일 동안 세파에 시달리다가 성당에 와서 하느님의 말씀과 신부님의 강론으로 활력을 얻고 가는데, 죄송하지만 신부님, 오늘 신부님의 강론은 전혀 준비 없는 그런 말씀이셨습니다. 제 말을 꼭 귀담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분께 그게 사실이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분은 사실이라고 답하면서 “글쎄, 그날 제 친구들이 이 말을 듣고 ‘야, 여기는 미국이 아니야, 한국이야, 신부님 강론이 그럴 수도 있지, 야 너 같은 신자가 있다면 어디 사제생활 하겠냐?!’ 하며 저를 야단쳤습니다” 하고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이 말을 듣고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강론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지금 퇴직한 후 한 병원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의사공부 못지 않게 신학과 성경 연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에 미사강론의 청중들 가운데는 다양한 계층의 여러 전문가들도 함께 있다는 점을 사제들은 생각하고 첫 미사 봉헌의 그 열정으로 강론에 임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강론하는 사제, 어머니의 마음을 지녀야

「복음의 기쁨」 139-141항은 강론하는 사제가 바로 교회 공동체의 대표로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의 정성된 마음으로 친밀함, 따스한 어조, 가식 없는 말씨, 기쁨에 넘치는 태도를” 지니도록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강론은 대화입니다. 따라서 강론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간의 참 대화를 위한 촉매제여야 합니다. 진실한 대화는 사랑과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합니다. 우리의 강론이 바로 이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사제적 귀중한 체험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첫 사랑,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헌신의 다짐이 있습니다. 그 체험과 헌신을 기도로 우리는 온 마음, 온 몸을 다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체험을 감격과 감동의 언어로 새롭게 전하고 나누어야 합니다. 사제적 체험의 나눔과 감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강론준비의 핵심, 연구와 기도와 묵상

「복음의 기쁨」은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강론준비에 정성을 쏟도록 권고합니다. 연구와 기도와 묵상 이것이 강론의 바탕입니다. 요사이는 각종 성서 모임이 많습니다. 성서체험 나누기도 있습니다.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어떤 경우에는 사제보다 성경 지식에 있어 뛰어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강론은 단순한 지식전달이나 지적 교환이 아니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사랑의 체험과 고백이기에 거기에는 심오한 사랑 하느님 체험이 더 우선합니다. 사제는 강론을 통해 하느님의 감동을 전해야 합니다. 이에 무엇보다도 「복음의 기쁨」은 말씀을 자기 것으로 삼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대중가요가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주는 이유는 구체적인 우리의 삶과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칼 바르트의 유명한 말,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손에서는 신문을 들고 교차해 읽으라”는 명설교의 방법을 다시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불멸의 사랑과 가치,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한 이 세상 현실에 살고 있으니 하느님 말씀을 기준으로 끊임없이 나 자신과 우리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기도, 아름다운 회개입니다. 이어 영적 독서와 함께 백성 앞에 백성의 말에 귀 기울이도록 「복음의 기쁨」은 권고하고 있습니다.

요사이 신문과 방송 그리고 우리는 모두 현 정권을 불통정부라고 꾸짖고 있습니다. 잘못된 정부, 잘못된 정권을 우리는 마땅히 꾸짖고 비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제는 본당 현실에서 과연 교우들의 말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불통정권, 불통정부를 우리는 꾸짖습니다. 그렇다면 사제인 우리는 교우들의 말과 요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교우들에게 다가가고 있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그 안에서 강론 자료를 새로이 찾고 메시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좋은 강론에는 ‘생각과 감성과 이미지가 담겨있어야 한다’는 노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기도 했습니다. 끝 항목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좋은 강론은 긍정적 언어에 있음을 상기하면서 하지 마라는 지적보다는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는 등 세심한 사안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사집행 이전에 말씀의 봉사자가 되어야 할 사제

사실 개신교 목사님들의 경우 설교는 그들의 제일 중요한 목회 책무입니다. 때문에 만일 목사님이 설교 준비에 부실하고 설교에 정성을 쏟지 않는다면 그는 곧 장로 모임을 통해 배척받아 그 교회 공동체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가톨릭의 경우,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되고 사제의 큰 직무 중에 하나는 성사집행이기에 미사에서 다소 강론준비가 부실하고 강론에 정성을 쏟지 않았다 해도 후반부의 성찬의 전례 거행이라는 미사봉헌과 성체성사 집전이 강론의 부족함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톨릭 사제의 경우 성사집전에만 매달리는 형식적 사목자가 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강론 책무를 목사님의 설교와 비교하면 크게 못 미치는 현실입니다. 이에 3년 거치 5년 상환이라는 법적 용어에 근거하여 사제들은 3년 또는 5년이면 본당을 이동하기에 강론에 쏟는 정성이 상대적으로 매우 약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사제들이 강론준비에 더욱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학교에서 배웠듯이 종말론적 자세로 미사 봉헌하라는 교훈을 이제 우리는 이 강론이 내 생애에서의 첫 강론, 마지막 강론 그리고 단 한 번의 강론이라는 생각과 결단으로 매 미사강론에 임해야 한다고 감히 다짐해 봅니다.

전례시기의 새해인 대림절에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미사를 봉헌하며 강론대 앞에 섭니다.
하느님, 제 강론을 하느님께 그리고 사랑하는 모두 교우들께 정성껏 바칩니다.
이끌어 주시고 받아주십시오. 아멘.
신부님들의 영육간 건강을 기원하며 건투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11월 14일
                  연중 제33주일 신도주일에
                  신자들을 위한 사제적 봉사를 겸허하게 다짐하며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가족들과 함께
                  함 세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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