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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위령성월의 기도와 성찰 (함세웅 신부/ 서울 교구)
   기쁨과희망   2017-11-07 11:06:42 , 조회 : 210 , 추천 : 91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수없이 바쳤던 위령미사 감사송의 한 구절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이라는 호칭이 첫째입니다. 그런데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는 반명제 말씀도 있습니다.

이를 종합하면, “주님!” 이란 호칭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숱하게 ‘주님!, 주님!’하며 아주 쉽게 하느님을 불렀지만, 주님을 부르고 찾는 그 만큼 과연 하느님의 뜻을 실천했는지 되물어야합니다. 성경말씀과 앞서가신 분들이 바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 주는 교훈입니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라는 공동묘소 앞의 라틴어 명구를 되새기며 실천을 다짐합니다.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고 외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전적봉헌, 전적투신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신앙의 예범, 신앙의 아버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정든 땅, 고향과 부모를 떠난 사람, 믿음 때문에 아들을 얻고, 믿음 때문에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여정을 계속 했고 믿음 때문에 또 아들을 번제물로 바칠 수 있었고, 이에 만민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은 바로 믿음의 기둥, 신앙의 예범입니다.

새삼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해봅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합니다.아브라함을 예범으로 신학자들은 믿음을 선택과 결별, 목숨을 건 결단과 다짐, 단절과 비약 등 여러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과연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곧 의화(義化)를 확신했습니다. 믿음으로 유다 전통과 함께 율법 체제를 넘어 신앙의 세계, 새로운 지평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모든 성인의 날 축일 전야에 마르틴 루터는 바로 이 믿음으로(로마 1,17) 교황 앞에 우뚝 서서 중세 교회의 비리,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던 맘몬사상과 상업주의를 깨고 물량주의적 가시적 교회에 대해 ‘아니오!’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지금도 우리 현실에서는 “이것은 아닌데!” 라는 근원적 의문이 끝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게 나라냐?” 고 외쳤던 촛불혁명의 교훈은 “이게 교회냐?”라는 신학적 고발로 우리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 너무나도 많은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일제 침략당시 프랑스인 뮈텔 주교가 사목하던 때의 모순, 노기남 방인 첫 주교와 그 후배 주교들의 중세식 사고와 원시적 형태의 사목,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윤공희, 김수환, 지학순 주교 등의 다소 개방적 사목실천이 있기는 했지만, 그 뒤 뒷걸음친 한국교회는 2000년대 이후 젊은 주교들로 다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큰 염려가 있습니다. 젊은 교구장들이 교회를 사사화하고 있다는 지적 때문입니다. 신원의식을 파악하지 못한 주교와 사제들이 곳곳에서 물량주의로 치닫고 있는 현실, 성지를 개발한다면서 오히려 자연과 문화와 역사를 파괴하는 큰 우를 범하고 있으며, 순교자의 얼과 정신은 간과한 채 외형적으로만 치닫고 있는 우리 교회의 현주소에 대해 뜻있는 많은 이들이 가슴을 치며 울고 있습니다.

“하느님, 죄인인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정화해 주십시오”(루카 18,13). 아멘.


함세웅 신부/ 서울 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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