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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이재천 신부 / 인천교구)
   기쁨과희망   2018-04-09 18:02:49 , 조회 : 48 , 추천 : 6



최근 나는 백상현의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를 읽었다. 정신분석학자의 책이라 어려웠지만 읽는 내내 글에 매혹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제라는 내 자아를 흔들었던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내 사제 삶을 돌아보면서 가슴을 울렸던 느낌을 일부 나누고자 한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성학대가 몇 달째 뉴스의 주요 기사로 올라오고 있다. 나도 ‘성직자’라는 교회 내 권력과 ‘남성’이라는 성정체성을 함께 가지고 20여 년 살아왔었기에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 여성을 어떻게 대했나?
반성은 꼬리를 물며 계속 이어졌다. 재물 앞에서 자유로웠나? 권력 앞에서 눈치 보지 않았나? 인정받음에 굶주리지 않았나? 살펴보니 참으로 약하고 죄 많은 자신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의 평온한 일상은 사실 ‘적당히 속아주는’ 기능에 의해 지탱된다….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적당한 속임수에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곳을 지탱하는 환상, 일종의 하얀 거짓말에 대한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정체성에서도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사회적 규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환상을 수용함을 의미한다."

사제 수품과 동시에 ‘성직자’라는 직함이 주어지면서 요구되는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땀 흘린 노력으로 성숙하게 갖추어가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성직자가 되면서 이미 나는 그런 존재로 여겨졌다.

“우리 신부님은 신앙심 깊은 사제이고, 성실하고, 착한 목자야!”

환상이 내게 입혀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세상이 입혀준 그 환상을 마치 진짜 내 것인 양 내면화시켰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신자들이 갖고 있는 환상과 나의 실체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고, 그래서 혼란스러웠고 괴로웠다. 하지만 보통의 신부들처럼 자연스럽게 타협하고 사는 법을 배워갔다.

교회 안의 성(性), 재물에 관한 문제들이 터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한다. 가톨릭교회가 가지고 있던 깨끗함과 거룩함이라는 종교적 환상이 무너질까봐, 신자들이 떠날까봐 두려워한다. 나도 가슴을 졸이면서 빨리 이런 사건들이 사람들 뇌리에서 잊히기를 바랐다. 우리는 세상에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우리들에 대한 과도한 환상이 지속되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 엠마 보바리는 언제나 ‘마치 -인 듯’ 살아가려는 의지로 가득하다. ‘마치 사랑이 존재하는 듯’, ‘마치 행복이 존재하는 듯’. 엠마 보바리는 인생의 환멸로부터 도피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인생이 드러내는 환멸을 잊기 위해, 그로부터 밀려오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무게에서 달아나기 위해, 우리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내가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던 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신자들의 환상과 내 모습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죄책감을 메워보려고 발버둥친 것이었으리라. 그리하여 ‘마치 거룩한 사제인 듯’ ‘마치 목자의 사랑이 넘치는 듯’ 심지어 ‘마치 예수님과 비슷한 존재인 듯’ 그렇게 나는 환상을 만들어 내고, 그 안에 머물러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살수록 인지부조화는 심해졌고, 이제는 그렇게 분열적인 삶을 살기에는 힘에 부치는 갱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강론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러분이 상상하는 사제가 아닙니다. 여성 앞에서 흔들리고, 재물이나 권력에서 멀지도 못하며, 인정받음에서 초월하지도 못하고 삽니다. 늘 그런 것들에서 실패했었고, 그래서 늘 그런 것들이 조심스럽고 두렵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신자들은 그런 나를 비아냥거리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연민과 애정으로 대해주셨다. 신자들의 환상을 깨뜨리기가 힘든 것인지 아니면 이것마저도 환상을 만들려는 내 전략인지 모르겠다.

"진리를 추구하는 소명의 공동체는 시지프스적 숙명의 공동체이다. 정상에 도달했다고 확신하는 순간 찾아오는 추락을 받아들여야 하는 공동체, 추락한 장소에서 다시 시작되는 절차의 무한 반복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공동체, ‘마치 -아닌 듯’ 살아가는 소명의 민주 공동체는 그렇게 다시 시작하는 공동체이다. 소명받은 자는 매일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발명해내야 하듯이, 소명받은 자들의 공동체는 그들의 시대가 요구하는 정의를 다시 발명해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지금처럼 분열적인 삶을 계속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자신을 진정성의 중심으로 통합하지 못하고 계속 가다가는 미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분열을 극복하는 방법은 스승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세상에서 버려진 자들과 함께 살면서 내 자신 역시 버려지는 삶을 사는 방법 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사유의 끝에 이른 삶을 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직 이 별거 아닌 기득권에 대한 미련이 용기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나를 만지지 말라” 이것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요청이다. 죽임을 당한 며칠 뒤 부활한 예수를 발견하고 놀란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는 말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당대의 고정관념에 의존하여 해석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을 것이다. 당신들 세계관의 한계 안에서 나의 죽음을 이해하려 하지 말라고, 그리하여 슬픔이 봉합되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나의 죽음은 당신들이 속한 세계의 균열이므로, 영원한 상처로 남게 하라고 말이다.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그리하여 애도의 작업이 완료되지 않는 한 그는 영원히 죽지 않은 존재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그의 죽음의 의미가 슬픔 속에서 다시 사유되는 방식으로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재천 신부 / 인천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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