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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 선교사의 결단 <인터넷에서 퍼온 글>
   기쁨과희망   2019-07-02 11:55:37 , 조회 : 80 , 추천 : 8




(김지훈 목사님이 얘기하신 은혜 받은 예화입니다)  

구한 말 1892년, 사무엘 무어라는 선교사님이 당시 32세의 나이로 조선에 들어오셨습니다. 이 무어 선교사님은 서울 소공동에 ‘곤당골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예수학당이라는 학교를 열어서 당시 교육을 받지 못하던 조선인을 교육하는 데 힘을 썼습니다. 학생들 가운데는 ‘봉주리’라고 불리는 학생이 있었는데 이름이 아닌 별명으로 불린 이유는 이 학생이 백정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백정은 인간으로 취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변변한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봉주리’가 무어 선교사님께 뛰어와서 아버지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부랴부랴 무어 선교사가 봉주리 집에 가보니, 장티푸스였습니다. 이 당시에는 장티푸스에 걸리면 평균적으로 3주 안에 죽었습니다. 이때 무어 선교사는 당시 의사였던 에비슨 선교사를 데리고 가서 치료하게 하였습니다. 이 에비슨 선교사는 당시 고종 황제의 주치의였습니다.

이후에 에비슨 선교사가 3차례 더 왕진을 하며 봉주리의 아비 백정 박씨는 깨끗하게 낫게 됩니다. 그리고 박씨와 봉주리는 당시 사람들이 인간으로 취급해 주지도 않은 자신을 무어 선교사와 왕의 주치의가 극진히 돌보아 완치된 것에 감격해서 곤당골교회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무어 선교사는 주님이 주신 ‘환한 봄이다’라는 의미로 박성춘이라는 이름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이 박성춘에 의해서 교회가 난리가 났습니다. 양반 성도들이 박성춘이 백정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무어 선교사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우리 양반은 백정과는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으니 백정을 내쫓고, 출교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물론 무어 선교사는 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만류하자, 사태는 더욱 심각해 졌습니다. 당시 이 교회 성도가 100여 명이었는데 80명의 양반 성도들과 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무어 선교사를 찾아와서 만일에 교회에 양반의 자리를 만들어 주고 그 뒤에 백정이 앉도록 따로 자리를 구별해 주지 않으면 80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교회를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무어 선교사님은 기도하며 결단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함을 설교합니다. 결국 무어 선교사님의 결정으로 교회에는 양반들의 자리를 만들지 않았고, 결국 이 양반 교인 80명은 곤당골교회에서 나갔습니다. 그리고 양반을 위한 교회, 홍문동교회를 따로 세웠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가장 난처한 사람은 백정 박성춘이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교회가 분열이 되었고, 대부분의 교인들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하느님의 뜻이 신기한 게요. 이 박성춘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 아무도 사람 취급 해주지 않는 나를 무어 선교사님은 사람 취급해주더라, 아! 그 누구도 나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지 않는데, 예수님의 사랑은 정말로 나 같은 백정도 사람이라고 안아주시더라 하는 것이 박성춘의 마음에 깊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가슴에 안은 박성춘은 서울은 물론이거니와 수원에 있는 백정에게 찾아가서 전도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차츰 백정교인이 늘어나서, 이후에 곤당골교회는 백정교회라고 불렀습니다. 반면에 홍문동교회는 양반들은 나가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지만,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교회의 본질을 외면했던 교회는 결국 점점 쇠퇴합니다.

왜요? 교회가 해야 하는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4년 후에 양반 교인들이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무어 선교사님께 돌아옵니다. 그리고 양반 홍문동교회와 곤당골 교회가 합쳐져서 세워진 교회가 지금도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입니다. 이들은 교인의 80%가 빠져나가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뜻, 하느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가치를 따라서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몇 년 후에 백정 박성춘은 승동교회의 장로가 되었는데, 이런 예수그리스도의 가치만을 추구하던 교회가 주변에 좋은 소문이 나자, 그 이듬해에 왕손이었던 이재형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백정과 양반이 예수 안에서 한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무어 선교자의 후원과 왕손 이재형의 도움으로 박성춘을 포함한 백정들은 조선 정부에 백정해방을 위해서 탄원서를 올렸고, 마침내 이 땅에 백정들이 해방되는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마르다 헌트리’는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이 한국 백정들의 기쁨보다 더 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넷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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