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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평화를 찾고 추구하여라”(시편 34,15) <심용섭(아우구스티노) 신부 / 서울교구>
   기쁨과희망   2020-07-09 14:21:49 , 조회 : 26 , 추천 : 2




6·25사변이 일어난 지 칠십 년이 지났다. 불행하게도 아직 평화를 이룩하지 못했다. 어정쩡한 상태에서 살고 있다. 이따금 긴장상태가 궤도를 벗어나긴 하지만 국가적 차원의 총체적 전쟁은 놀랍게도 다시 일으키지 않은 채,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다. 관성에 젖어있을 뿐 평화는 아니다. 칠십 년이 지났어도 우리나라나 북쪽이 입은 각 분야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는데 평화를 찾는 열정이나 끝까지 따라가려는 항심은 더 잦아든다.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다루면서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롭다. 평화롭다’”(예레 6,14)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들이란 “부정한 이득만 챙기는”,  “낮은 자와 높은 자” 그리고 “거짓을 행하고 있는”, “예언자와 사제”를 가리킨다(예레 6,13 참고). 이 시대의 시각으로 보면 사회나 교회의 높고 낮은 사람들을 다 지칭한다. 우리는 지금 평화를 찾아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산다. 평화는 기성품이 아니고 우리가 찾고 만나고 끝까지 따라가야 하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루카 12,51)”고 하신다. 마태 10,34에서는 더 강력한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여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신다. 예수님이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왔다”(마르 10,45)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보면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때까지 세상이 평화를 주는 방식과 다르다(요한 14,27 참고)는 것을 일러준다.

예수님 당시에 횡행하던 로마제국의 이념,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통치자’라는 자들이 백성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마르 10,42)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이 방식으로는 국가도 사회도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일깨우고 싶어 하셨다. 그 당시 로마 못지않게 화려했을 예루살렘을 보시고 그분은 “우시며” 그 도시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하고 안타까움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이어서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고 하신다(루카 19,41-42 참고). 그 영광스럽던 도시가 제대로 각성하여 멸망을 피할 수 있는 길은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때”를 알아보는 데 있었다(루카 19,44 참고). 예수님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는 사명을 띠고 오신 분임을 인정했다면, 멸망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걸어가신 길이 시대에는 설득력은커녕 호소력도 없어 보인다. 코로나 역병을 계기로 깨우칠 만한데 아직도 인간 능력에 대한 간신이 앞서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이사 55,3)고 하셔도 딴청이다. 또한 듣는 데에는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해”(신명 30,2)야 하는데 정성을 안 드린다. 예레 23,33 이하에서는 하느님의 ‘신탁(神託) 말씀’을 ‘짐’으로 비틀어 말하기까지 한다. 히브리어에서 한 단어가 신탁이나 짐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가”라는 질문을 “무엇이 하느님의 짐이냐”고 바꾸어 말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가리킨다. 이 시대에는 이런 자세가 없을까?

예수님이 오실 때와는 달리 가실 때에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요한 14,27)고 하신다. 이 평화 유산을 지키기 위해 우선 우리 자신의 잘못을 하느님께 고백하고(다니 3,26-45; 바울 3,11-35 참고), 둘째로 사도 바오로 말씀대로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아”(로마 14,19) 평화를 이루도록 애써야 한다.


<심용섭(아우구스티노) 신부 / 서울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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