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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집과 강도의 소굴’ (마르 11,17 참조) <심용섭(아우구스티노) 신부 / 서울교구>
   기쁨과희망   2020-09-07 11:11:00 , 조회 : 16 , 추천 : 0




예수의 죽음을 결정적으로 촉발시킨 원인은 그 분의 성전 정화에 있었다. 당시 순례자들이 먼데서부터 하느님께 바칠 산 제물을 끌고 오는 불편을 덜기 위해 마련되었던 거래를 보시고 예수님은 용납할 수 없는 선을 넘었다고 보셨다. 그것은 편리를 앞세워 봉헌물을 준비하던 제도적 관행이 본질적인 기도를 뒷전으로 밀어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시던 때로부터 육백여 년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이스라엘에 파견되었던 예레미야 예언자를 만난다. 그 분이 당시 성전에 대하여 지녔던 자세를 신랄하게 꾸짖었던 원조다.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예레 7,4).

이 말씀은 육십여 년 전, 우리가 신학대학 철학과 재학 시절에, 당시 불란서에서 오신 노단열(Daniel Bouchez) 철학 교수 신부님이 이튿날 바칠 묵상 기도를 준비시키면서 처음 들려주셨다. 그 말씀과 그에 따르는 내용 및 설명이, 구약성경을 가까이 하거나 기도로 비추어 듣는 기회가 많지 않은 때여서 내게는 굉장히 신선하고 심지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지금까지도 마음속에서 지표 구실을 하고 있다.

문헌 역사는 잠시 제쳐두고 내용을 따라 성전의 역사를 간단히 짚어 본다면 성전은 애초에 하느님을 만나는 장막이었다. 당시 여기 저기 옮겨 다니는 생활에 걸맞게 만남의 장막도 옮겨 다녔다. 중요한 것은 만남에 있었다. 이 만남의 결정적이고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시나이 산에서 경험한 하느님과의 만남과 계약이었다. 이것을 신앙고백의 찬양으로 엮어 낸 것은 탈출기 15,1-21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산은 “거룩한 처소(13절)이고 하느님 자신이 “살려고 만드신 곳”이고 “손수 세우신 성소”(17절)이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이 내용을 담고 있고 생활화하던 곳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제 성전이 옮겨 다니지 않고 붙박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하느님이 “거룩함으로 영광을 드러냈던(탈출15,11) 사실임을 슬금슬금 잊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왕국이 갈라진 다음부터는 남쪽에서 왕정 신학과 성전 신학이 뚜렷하게 정착되어 갔고 북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역사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 양극화의 전승이 얼마나 깊게 뿌리 내렸는지는 요한 4,20이하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의 대반전이 제시된다. 장소 위주의 예배를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요한 4,23)의 예배로 바꾸신다.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한다”(요한 4,24)고 예수님께서 확언하신다.

고린토전서 7,19는 “우리의 몸”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이라고 하고 고린토후서 6,16은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임을 가르쳐준다(에페 2,22참조). 요한 2,21에서는 예수님이 당신 몸을 두고 성전이시라고 하신 말씀을 듣는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일은 지금도 사방에서 이루어진다. 예레미야에 따르면 행실을 고치지 않고 올바른 일을 마다하며 약자를 억누르고 무죄한 이의 피를 흘리며 이웃에게 해악을 끼치고 자신도 모르는 거짓 신을 따라가면(예레 7,5-11 참조) 기도의 집인(이사 56,7)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바뀐다. 그러면서도 외치는 “하느님의 성전이다”라는 구호는 하느님을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도구로 전락시킬 뿐이다.

하느님을 만나는 일도 그분의 힘과 영광을 보는(시편63,2)일도 없는 얼빠진 성전을 세울 뿐이다. 성전이 사람을 마비시키는 고급(?) 역할을 대행한다. 악역을 한다고 지적받아도 꿈쩍하지 않는다. 이미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지 않으면 성전은 역시 강도의 소굴일 뿐이다. 그 성전이 외적인 건물뿐 아니라 우리 자신임을 생각하면 기도 없는 신앙인 역시 움직이는 ‘강도의 소굴’이 될 수 있다.

세상이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라면 인간은 세상도 ‘강도의 소굴’로 만들면서도 사람을 현혹시키고 마비시키는 새 구호를 끄집어 낼 수 있다.  

<심용섭(아우구스티노) 신부 / 서울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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