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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좋은가...


   

평신도 희년에 ‘사제’를 생각한다 (김동희 신부 / 의정부교구 청소년사목국장)
   기쁨과희망   2018-05-17 16:28:26 , 조회 : 54 , 추천 : 8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3-1965)를 통해 가톨릭교회의 변화를 접하신 한국천주교회의 주교님들은 1968년도에 ‘평신도사도직협의회’(평협)를 설립하셨다. 복음에 충실하면서도 세상과 역사에 무관한 것이 아니라 ‘세상 안의 교회’로 살아가기 위한 공의회의 정신(특히 평신도 사도직)을 깊이 이해한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올해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평협 설립 50주년을 기념하며 ‘평신도 희년’을 지내고 있다.

지난해에는 사제서품 20주년을 맞아 4박 5일간의 여행을 동기 신부들 10여 명과 함께했었다. 마지막 날 미사 주례와 강론을 내가 하였었다. 그런데 몇 달 전 동기 신부 하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 친구가 그날의 강론을 기억한다며, 그것이 가슴에 콕 박히며 다가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그것은 내 말이 아니라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49항의 일부분이었다. 그 구절은 그 친구만이 아니라, 먼저 나를 사정없이 흔들고 나의 뇌리에 그대로 꽂혀버린 표현이었다. 그러니 그날 자연스럽게 외워서 동기들에게 강론 시간에 들려줄 수 있었다.

“저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구절 너머에 실루엣처럼 자리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그 곁에는 친한 동기 신부들도 보였고,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선후배 신부들의 모습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사제로서 대충 살아가려는 이들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보려, 또 신자들을 위하는 사제로 살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절차의 거미줄을 촘촘히 쳐놓고 교회와 본당을 견고한 조직으로 만드는 ‘가혹한 심판관’이요 관리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또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지는 않더라도 중심에서 밀려난 듯하면 이내 심보가 뒤틀리는 고약한 노총각, 그러기에 더욱 절차를 내세워 사람들을 옥죄고 일의 진척을 가로막으며 결국에는 나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이끄는 이는 다른 누구보다도 나였다.

평신도 희년에 나는 ‘사제’를 먼저 생각해 본다. 천주교의 전래 초기에 사제가 끔찍이나 귀중했던 교회의 역사 때문인지 유독 사제를 공경하는 한국천주교회에서 사제와 평신도의 관계는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이는 단순한 권력 다툼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생명과 사랑의 복음을 중재하는 교회의 본질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는가 하는 사목적 물음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평신도 희년을 골백번 지내도 이대로는 안 된다. 절차에 대한 집착과 중심을 즐기려는, 어느새 우리 사제들을 잠식해버린 저 거미줄에서 우리 사제들 먼저 해방되지 않으면, 그래서 평신도들을 자유롭게 끌러주어 해방케 하는 그런 희년이 아니라면 ….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 권고의 같은 항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진정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에서 위로와 빛을 받지 못하고 힘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허물과 상처를 받아주시고 씻어주신, 나를 소생시키시고 전율케 하여 사제직에 응답케 한 그 하느님의 자비를 다시금 생각할 일이다. 그 자비의 샘물을 거듭 들이키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매일의 ‘사목적 회심’(자비와 비참, 5항)이 절실하다. 평신도 희년에 나는 평신도가 아닌 사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동희 신부 / 의정부교구 청소년사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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