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udium et Spes Pastoral Institute *
 





이대로 좋은가...


   

송기득 교수 <편집부>
   기쁨과희망   2020-07-09 14:26:16 , 조회 : 30 , 추천 : 0




송기득 교수(86)는 철학자이지만 진보적인 신학자로 더 유명하다. 오랫동안 신학 비평을 내면서 신학강의와 ‘역사의 예수’ 등 많은 종교 서적을 냈다. 목원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근무하다 은퇴하였다. 뉴스 앤 죠이와의 대담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였다.

Q. 가난과 싸워가며 굳은 집념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결국 목사가 되지 않았는데….?

A. 손양원 목사 설교에 뿅가서…. (웃음) 중2 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기왕이면 ‘믿는 학교’(미션스쿨)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해서 순천 매산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매산고를 나와 연세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장학금을 받아 7학기 만에 졸업했다. 잘 풀리나 싶었는데, 이후 결핵에 걸려 3년을 고생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 이때 ‘나는 내가 산다. 다른 사람은 나를 살아주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 그대로 결핵의 은총이었다.
살아났을 때 연세대 김하태 박사가 대학원도 안 나온 나를 전임 조교로 채용해줬다. 김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파울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을 소개한 분이기도 하다. 김 박사님이 적극 밀어줬는데, 3년 반 만에 대학에서 쫓겨났다. 군사 구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군 미필자는 직장에 다닐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결핵 때문에 군대에 못 갔는데, 어이가 없었다.
한신대 연구생으로 신학을 공부했지만 철학에 더 마음이 쏠렸다. 연세대 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후에도 목사가 될 기회가 주어졌지만, 목사 대신 교수가 됐다. 그것이 하느님 뜻이라고 생각했다.  

Q. 대학원까지 나와서, 일부러 ‘거지의 삶’을 살기도 했다. 계기가 뭔가?

A. 내게는 역마살이 있었다. (웃음) 서른 살 때였는데, ‘나’(자아)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계속 걷고, 돈은 쓰지 않고, 숙식은 구걸하기로 했다. 아마 2,000리 정도 걸었던 것 같다. 괴롭지는 않았다. 다양한 사람을 만난 건 좋은 경험이었다. 특히 강릉에서 모든 교회가 떠돌이를 외면할 때, 술집 여종업원이 일면식도 없는 나를 위해 묵을 곳을 알아봐 주고, 식사를 대접해 준 건 잊을 수 없다. 그녀는 내게 ‘성모’와 같은 ‘님’이었다. 내 인생의 스승이다. 교회에서 쫓겨나고, 술집에서 구원을 얻은 셈이다. (웃음) 그후 3년 동안 결핵환자들을 위한 요양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Q. 일생 동안 신학을 연구해오셨다. 누구보다 기독교에 대학 애착이 강할 것 같은데, 오히려 ‘교수 정년 은퇴와 함께 기독교를 떠났다’고 선언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A. 기독교의 교리를 인정할 수 없었다. 특히 대속론은 ‘역사의 예수’(맨사람)와는 무관하다. 그리고 교회가 싫었다. 너무 쉽게 하느님을 이야기한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이야기하면서 걸핏하면 지옥에 간다고 겁박한다. 사랑하는 자녀를 지옥에 보내는 부모는 없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짓거리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최대의 모독이다.

Q. 한국교회가 지금보다 나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A. 목사들이 교만하면 안 된다. ‘하느님 놀이’를 하면서 자꾸 위(하느님 자리)로 올라가려 한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죄는 hybris(자만)이다. 그러니 지금 하고 있는 ‘갓 플레이’(하느님 놀이)를 멈춰라.


<편집부>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8tu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