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udium et Spes Pastoral Institute *
 
                 
 
 
 

 


 

 

 






사회적 이슈와 일상의 물음 속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려는 우리들의 생각을 모아봅니다.


   

소외된 죽음을 위하여, 메멘토 모리! ...... (오민환 / 바오로)
   기쁨과희망   2007-11-05 16:37:18 , 조회 : 2,874 , 추천 : 465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 말은 경험을 통해 인간이 얻게 된 보편적 자기이해이다. 죽음은 보편적인 인간의 현상이기에 신학의 주요한 주제가 된다. 또한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인간실존은 본질적으로 죽음을 향해 있다. 신학과 철학에 있어서 죽음의 이해는 삶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다. 또한 인류의 역사에서 죽음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라는 말이 있다. 당신도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소리다. 로마제국 당시 승리한 장군이 입성을 하게 되면, 그의 노예 하나를 세워 ‘메멘토 모리’를 복창시켰다 한다. 승전가와 장송곡이 함께 울려 퍼지는 형국이다. 로마의 위용을 빛낸 개선장군은 백성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 역시도 죽음을 비껴갈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소리다.

위령성월에 많이 듣게 되는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Hodie mihi, Cras tibi), 그리고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경구 속에서도 죽음은 우리의 삶에서 소외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의 운동은 죽음마저도 우리의 삶에서 소외시키고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의 중요한 고비에 가족공동체의 배려와 보살핌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지고, 돈이면 다되는 그런 사회가 되었다. 죽음이 더 이상 일상에서 기억되지 않는다. 죽음도 상품으로서만 가치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이 더 허무한가 보다.

2006년 사망 통계가 눈에 들어온다. 가정(30%), 의료기관(55%), 병원 이송(15%)의 순으로 우리사회의 구성원은 죽음을 맞이했다. 10년 전 병원에서 사망한 경우는 18.1%였다고 한다. 과거 우리사회는 객지에서 죽은 시신은 집에 들이지 않는 풍속이 있었다.

통계에 의하면 이젠 약 70%의 국민이 ‘객사’(客死)를 하고 있는 셈이다. 객사라 집에 시신을 들일 수 없는가. 온 가족이 지켜보고, 자기가 살아왔던 정들었던 집안을 둘러보면서 죽을 수도 없다. 아니 모두 객사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상조사업’은 미래의 전망 있는 서비스업이 되어가고 있다.

죽음의 순간마저도 우리는 자신을 그렇게 소외시키고, 죽음이 마케팅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사회는 죽음을 이렇게 소외시키고 낯설게 만들고 멀리하게 되었다. 죽음은 당사자가 아니면 결코 닥치지 않을 현실처럼 보인다. 그래서 자신의 동네에 (어차피 이도 상업화되었지만) 납골당이나 화장장이 들어서는 것을 ‘죽도록’ 반대한다.

인간을 ‘죽도록’ 사랑한 예수도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도 철저한 실패로서 죽음이었다. 그러나 철저한 실패자 예수가 그리스도로 고백된다. 역사를 살았던 예수에 대한 공동체의 ‘기억’이 그를 살렸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의 죽음을 기억했고, 그와 함께 했던 삶을 기억했다. 그래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이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다. 부활이전에 수난과 죽음이 있다. 이로써 초라했던 예수의 죽음이 거룩한 죽음이 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죽음이 허무하지 않은 것은 ‘생명’의 길을 알려 준 예수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그 기억은 예수의 죽음에서 비롯한다. 생명의 길은 죽음의 길과 함께 나있다. 생명은 사는 것이고, 죽음은 기억하는 것이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는 우리는 항상 깨어서 죽음을 기억하고 죽음과 함께 살아야 한다(마태 25,13).

<오민환·바오로/ 본 연구원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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