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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포와봉사(Kerygma et Diakonia)'는 사제들을 위한 강론길잡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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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제3권-통권 45권 - 3·1절과 재의 수요일 그리고 백남준의 교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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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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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0 10:39:01 , 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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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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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과 재의 수요일 그리고 백남준의 교훈
3·1절, 87년 전 1919년의 현장으로 돌아가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외쳤던 선조들을 새롭게 만나며 선열들께 오늘의 현실을 보고드립니다. 일제의 만행과 폭압에 맞서 인간의 이름으로 독립만세를 불렀던 선조들을 기리면 가슴이 뛰고 더욱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피맺힌 과거를 잊지 않고 생생히 기억하는 민족에게만 희망이 있다는 말씀을 새삼 되새깁니다.
묘하게 올해는 3·1절이 재의 수요일입니다. 다시 이마에 재를 받으며 회개를 다짐합니다.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의 속죄기도는 바로 선조들께 아뢰는 고백과 다짐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회개란 무엇인가’ 이렇게 깊이 자문해 봅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작고한 포스트모더니스트이며 비데오 예술 작가인 백남준 선생의 장례식을 영상으로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남긴 어록 중에 ‘예술은 사기다’라는 표현을 모든 언론이 집중적으로 보도했고 피아노를 부수고 넥타이를 자르는 그야말로 별것도 아닌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예술적 관점에서 평가했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고전적 예술 칭송론자들에게 백남준 작가의 돌출적 발언과 행동은 일종의 언어폭력이며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술은 사기다”라는 백남준 작가의 어록이 의미 있게 평가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어쨌든 거의 모든 언론은 그가 독일과 미국 등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풍토에서 예술을 펼쳤기에 성공할 수 있었지, 만일 그가 한국 땅에서 활동했었다면 그의 잠재력과 창조력은 짓밟혔을 뿐, 결코 이렇게 꽃피지 못했을 것이라 평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답답하고 폐쇄된 오늘의 교계제도문화에 큰 시사를 주는 교훈입니다.
백남준 작가의 돌출적 발언과 부수고 자르는 행위를 이 재의 수요일에 회개와 연계하여 생각하고 싶습니다. 예술은 분명히 아름답고 고귀하며 창조적이고 새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남준 작가는 “예술은 사기다”라고 천명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예술의 진정성과 함께 예술의 사기성을 함께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명제는 우리 종교와 교회 그리고 사제생활과 신앙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종교는 사기다’, ‘교회는 사기다’, ‘사제생활도 사기다’, ‘신앙도 사기다.’ 이러한 부정적 명제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청천벽력이며 신성 모독과 같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의 종교와 교회 그리고 사제생활과 신앙 안에는 사실 ‘사기성’도 있다는 인정이 하느님 앞에 참으로 용기 있는 그리고 겸허한 고백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성서와 신학 그리고 영성의 과정에서 헤겔의 변증론을 응용하면서 신학적 재해석과 이른바 ‘해석학적 순환’을 꾀하고 있는 그 근본적 의미를 우리는 보다 진지하게 깊이 묵상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이해와 표현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며 한계적입니다. 토마스아퀴나스는 이 한계를 유비(analogia)어법으로 극복하려 했습니다. 유비어법이란 같은 점도 있지만 동시에 다르다 라는 토마스 특유의 해석 방법입니다.
실존주의 신학자들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언급에서 헤겔의 명제, 반명제, 종합이라는 이른바 정반합(正反合)의 논리를 적용하면서 첫째, 하느님은 존재한다는 명제에 대해 둘째,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명제를 제시하며 이러한 하느님의 부재체험 또는 부재현상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하느님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실존적 고백의 종합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영성과정에서도 독수자, 은수자, 영성대가들의 삶의 과정도 긍정과 부정 그리고 다시 긍정하는 변증론적 과정을 통해 한 단계씩 상승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하느님의 부재체험, 어둠의 길, 사막의 체험 등이 바로 반명제의 과정이며 이것은 단순한 거부가 아닌 더욱 분명한 긍정과 확인을 위한 잠정적 부정이랄까 또는 전략적 부정인 것입니다.
2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성녀 소화 데레사에게도 그 제한된 가르멜 수도원의 영역 속에서 어둠과 암흑을 헤매면서도 뻥 뚫린 하늘을 향한 초월의 긍정을 확인할 수 있었던 귀중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먹구름과 천둥, 번개, 소나기의 이 막막한 현실에서 먹구름을 넘어선 하늘의 찬란한 태양을 그릴 수 있었던 소화 데레사는 정녕 희망과 상상신학의 확인자이기도 했습니다.
아우구스띠누스의 고백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만일 당신이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이해한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부분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 생각에 속은 것뿐입니다.”(Sermo,52.c.6.n.16(PL38.360), 엘리사벳 존슨, <하느님의 백한번째 이름>, 바오로딸, 2000, 169이하)
이런 관점에서 백남준 작가의 ‘사기’란 표현을 생각한다면 신관, 신학, 종교, 교회, 교계제도, 사제생활, 신앙 전반에 대한 우리의 모든 명제는 결국 한계가 있고 때문에 그 안에서 일정한 부분은 꼭 ‘사기성’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기성’에 대한 깨달음과 인정은 철저하게 자신과 싸우고 그리고 현실과 제도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진정성’과 ‘참됨’ 곧 하느님을 찾으려는 순수한 열정과 갈망의 표출입니다. 인생은 한줌의 재임을 고백하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씀과 함께 머리숙여 이마에 재를 받는 이 행위는 사실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엄청난 의미를 일회적 행업으로 지나쳐버리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께서 기존의 유다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율법학자들을 질타하시고 꾸짖으신 근본 이유는 바로 이러한 회개를 위한 도전과 도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안식일 규정, 정결례법을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어기시면서 법의 근본정신을 설파하신 예수님, 사람의 것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치는 전통 고수자들의 그 위선과 가식을 무섭게 질타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언행이 바로 유다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종교는 사기다’ 라고 말씀하셨을 교훈입니다.
물론 종교의 순기능, 교회의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 일치와 화해 등 통합 기능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법을 어기시고 채찍으로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몰아내시고 채찍으로 치셨습니다.
정의와 저항,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해체기능입니다. 이 해체기능이 ‘종교는 사기다’라는 식으로 재해석되고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의 수요일, 모든 가톨릭인들이 이마에 재를 받습니다. 재 같은 존재, 재만도 못한 존재, 하느님 앞에 벌레 같은, 구더기 같은 존재라는 겸허한 자기 고백을 통해서만 하느님 앞에 가장 성스러운 의인으로 변화된다는 이 가르침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며 회개의 예술, 비데오 예술, 영성의 예술입니다.
머리에 재를 쓰고 옷을 찢는 행위가 회개의 징표로 표시된 구약의 내용은 바로 백남준 작가의 예술 표현, 곧 피아노를 부수고 넥타이를 가위로 싹뚝 자른 행위라고 연계해 봅니다.
우리가 비록 미사 중에 제의를 자르고 제대를 부술 수는 없지만, 이 재의 수요일에 예수님께서 백남준 작가를 통해 주시는 교훈은 제단도 부수고, 제의도 잘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처구니없는 엉뚱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진정성 곧 예술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에 요엘 예언자는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어라”(2,13)고 외칩니다. 회개의 퍼포먼스는 제의를 자르고 제단을 부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찢고 부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장을 찢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게됩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란 죽음을 무릅쓴 결단입니다. 바로 재의 수요일과 사순절 우리는 바로 그 결단의 날, 결단의 시기에 와 있습니다.
3·1절,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목숨 바치신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숱한 익명의 선열들을 기리며 재의 수요일인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기성을 겸허하게 고백하면서 기존의 모든 것을 부수는 백남준 식의 예술적 결단을 되새깁니다.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시인의 외침과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으라”는 요엘 예언자의 무서운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 겸허한 모습으로 진정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떨리는 마음, 떨리는 손으로 한줌의 재를 들고 기존의 모든 것을 온전히 부수는 회개의 작업, 무서운 순간을 늘 되새기며 이 사순절과 올해를 주님께 봉헌합니다.
2006년 재의 수요일을 앞두고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가족들과 함께
함 세 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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