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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포와봉사(Kerygma et Diakonia)'는 사제들을 위한 강론길잡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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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제6권-통권 48권 - 청년사제의 열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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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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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8 13:57:03 , 조회 :
2,230 , 추천 :
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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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사제의 열정
<선포와 봉사>를 통해 또 신부님들께 7월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마침 7월 5일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지난 7월 2일(주일)에 모든 교우들과 함께 장엄하게 축일을 앞당겨 지냈기에 오늘은 평일 독서로 묵상하면서 김대건 신부님의 삶을 되새겼습니다.
올해는 특히 김대건 신부님 순교 160주년을 맞는 해이기에 저는 교우들과
함께 김대건 신부님의 삶을 여러 관점에서 생각하곤 합니다.
올해 우리 동창사제들은 사제 서품 39주년을 맞습니다. 저는 로마에서 사제가 되어 반년이 늦었는데 그만 햇수가 바뀌어 1968년에 서품되고 우리 친구들은
1967년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창모임에 가면 늘 동창이 아닌 친구가 왔다고 놀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하하!” 하고 웃습니다.
군대에서도 신학교에서도 그리고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는 이른바 밥그릇 수 또는 서열을 따집니다. 그것도 하나의 기준이니까 탓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만 따지다보면 또 다른 갈등과 경색적 문화가 형성됩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처럼 권력의 서열만을 따지지 말고 봉사하는 꼴찌가 되라고 권고하셨고, 사실 갈라3,28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례란 유다인과 이방인,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라는 당대의 3중 차별을 깨고 그리스도를 새롭게 입음으로써 온전히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평등과 일치가 그 핵심임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백정 출신의 황일광(알렉시오,1756-1802)이 세례를 받고 양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또한 양반들과 함께 한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을 때 “바로 여기가 천당이구나!”하면서 감격했던 일화도 바로 세례의 핵심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교자 황일광의 감격을 우리는 오늘도 재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네의 삶은 유감스럽게도 본당공동체 안에서도 친지끼리만 친할 뿐, 신분과 위치가 다른 이들에게 대해서는 냉냉하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 그 모든 사람에게 끈끈한 정과 감동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 삶이겠습니까?
저는 만 25세의 청년사제, 1년 1개월의 사제 김대건 신부님을 떠올리면서 오늘 우리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분은 그저 1년차 사제, 그리고 보좌사제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1년차 사제, 보좌사제 정도뿐인 김대건 신부님이 한국교회사 안에서 우뚝 설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 근거를 김대건 신부님의 영성이라고 합니다. 15세의 소년 김대건은 세례를 받으면서 이미 목숨을 걸었고 더구나 사제가 되기 위해 서울을 떠나 평양, 신의주, 만주, 요동반도 등 마카오에 이르기까지 무려 6개월을 육로로 걸어갔으니 그 과정이 바로 김대건 소년에게는 극기, 수련, 보속 등 그야말로 십자가의 길, 골고타의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과정은 참으로 죽음을 무릅쓴 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카오에 도착한 지 2개월 뒤인 8월에 마카오에 민란이 일어나 김대건 일행은 잠시 마닐라로 피신했고, 더구나 1838년 11월 17일에는 동료 최방제를 잃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839년 4월 또 다른 민란으로 김대건과 최양업은 마닐라로 다시 피신하여 그 근처 롤롬베이(Lolombey)의 수도원 농장에서 지냈습니다.
또한 김대건 청년은 1840-1842년 사이에 대국으로만 알았던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패하여 영국에 무릎을 꿇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잠든 조국이 잠에서 깨어나고 닫힌 조국의 문을 열도록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고 기도했으리라 추정합니다. 시대를 고민했던 청년 김대건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어쨌든 그는 부제가 되고 사제가 되는 동안 수차례 목숨을 걸고 만주를 통해 귀국했고 황해를 통해 중국을 오가며 오직 복음 선포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더구나 그는 1844년 초 서울에 몰래 도착하여 중병을 앓고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 이미 1839년에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가 순교한 뒤 홀몸으로 계신 어머니 우르술라를 얼마나 만나고 싶었겠습니까? 그는 뼈저린 이 인간적 아픔을 신앙으로 극복하면서 다시 황해를 거쳐 중국으로 갔습니다.
1845년 8월 17일 상해 근처 김가항(金家港)에서 사제서품 받고 10월 12일 강경을 통해 귀국한 그는 다음해인 1846년 4월 12일 용인, 곧 골배마실에서 10년만에 어머니를 만나 부활절을 함께 지내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극적 상봉이었습니다. 그 뒤 그는 1846년 6월 5일 연평도를 지나 백령도에서 청나라 배에 편지를 전달하고 난 뒤,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그해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1846년 죽음을 앞둔 그는 한국의 모든 교우들을 향해 뜨거운 목소리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깊은 뜻을 알아야 함과 섭리에 대한 철저한 의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세상에서 하느님을 알고 받들어 모시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목적임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의 밭입니다. 농부는 가을의 수확을 고대하면서 한여름의 햇볕을 견디어냅니다. 김대건 신부님는 이와 같이 종말론적 희망을 지니며 현실의 모든 것을 뛰어넘은 분입니다. 그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철저하게 따르며 한국교회와 신자들이 박해를 이겨내도록 당부하며, 불의한 악과 사탄과의 싸움에서 결단코 패배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김대건 신부님이 남긴 마지막 편지를 읽으면서 인생, 세상, 믿음, 하느님 등 큰 주제와 대상들을 새롭게 생각해 봅니다.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紙筆)로 다하겠습니까? 이만 그칩니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서 만나기 바랍니다.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이여 여러분은 이런 난시(亂時)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말고 주야로 주은(主恩)을 빌기 바랍니다.”
1년차 사제의 정열적 삶이 바로 우리 사제들의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 연륜도 중요하지만 저는 이제 젊은 사제들 안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목숨을 건 결단”을 직시할 수 있는 지혜를 갖고자 합니다. 젊음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청순합니다. 우리 모두 열정의 사제, 청순한 사제가 되도록 다짐하며 9월 순교자 성월을 준비합니다.
신부님들의 건투를 빕니다.
기도중에 2006년 7월 5일
김대건 순교사제 성인 축일에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후원회가족들과 함께
함 세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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