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udium et Spes Pastoral Institute *
 
                 
 




 

 


   

시대를 고민하는 사제들의 기도와 호소(종합 초안)
   기쁨과희망   2010-12-28 11:59:52 , 조회 : 2,128 , 추천 : 402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5,26)


편집자 주) 지난 12월 13일에 사제들이 발표한 내용이 이미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그 신학적 배경과 의미를 신부님들과 함께 더 깊이 생각하기 위해 여기에 종합 초안 전문을 싣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서 8,28)라는 성서말씀을 되새기며 시대의 징표를 깨닫고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 사제들은 지난 12월 8일 서울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기자간담회에서, 환경전문가들의 진지한 조언과 비판을 외면한 채 민주주의 절차까지 무시하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4대강 불법적 사업에 대하여 사실상 찬성한 발언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신비체의 같은 구성원으로 매우 안타깝고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지난 12월 10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명을 지지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첨언하고자 합니다.

복음 선포의 보편적 가치

1. 사제는 모름지기 하느님의 백성, 곧 전 인류와 개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 배려를 가져야 할 사목적, 신앙적 책무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사제는 또한 온 세상 만민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에 우리 사제들은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울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사제로서 보편적 선교임무를 망각한 채, 한 지체의 고통을 외면하고 결과적으로 이웃과 자연에 대한 사랑의 책무를 소홀히 한 점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매우 위험한 일임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정부가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는 4대강사업은 정부정책과 자연과학자들 그리고 토목공사자 등 전문가들의 영역 이전에, 바로 농민들의 삶과 국민 모두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자연과 물이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묵상했다면, 자연과 환경에 대한 교회공동체의 사회적 가르침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다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 단식과 기도를 통해 호소하고 있는 환경전문가들과 종교인들의 절절함에 귀를 기울였다면, 무엇보다도 자연과 자신의 삶을 하나로 생각하는 종교원리에 기초하여 지난 5월 30일 자신의 몸을 불사른 문수스님을 생각한다면, 정진석 추기경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갈구하는 이들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준 혼란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이 12월, 마구간에 탄생하신 예수아기를 새롭게 모실 은총의 대림절에 우리는 자선과 속죄 그리고 종말론적 희망으로 아픈 현실과 겨레의 고통을 외면한 정진석 추기경의 모질음에 대하여 함께 뉘우치며 회개의 기도를 올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바치신 기도 “하느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 라는 마지막 기도를 묵상하며 거듭 속죄의 기도를 올립니다.

주교회의의 합의를 존중해야

2. 주교회의의 일원으로서 정진석 추기경은 주교회의의 합의와 결정을 존중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비록 그가 주교회의 논의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반대의견을 개진했다 하더라도 주교회의의 합의를 따르는 것이 바로 교회공동체의 기본정신이며 주교동료성(collegialitas)의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두 차례에 걸친 주교회의 명시적 합의와 결정, 공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진석 추기경은 이를 서울교구 사제들에게 적극적으로 전달치 않았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외면해 왔으며 더구나 지난 12월 8일의 발언은 주교회의의 합의를 거스른 독선적인 부연으로 교회공동체와 주교회의와 분열을 일으킨 큰 잘못입니다.

‘추기경’의 어원은 주요핵심, 바탕이란 뜻으로 중세 교회공동체에서 시작한 명예 직분으로 그 지역공동체에서 첫째(primatus)라는 명예직과 함께 일치와 연대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진석 추기경은 바로 교회공동체의 이 일치성을 깨고 주교회의의 합의를 무력하게 만든 분열의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온 국민이 4대강 거짓 사업에 몸살을 앓고, 뜻있는 이들은 목숨을 걸고 현장을 지키며 밤새워 기도하고 주교회의도 이를 염두에 두어 토론과 고심 끝에 너무도 신중하게 발표한 가르침에 대해 자신의 뜻과 다르다고 이를 외면하고 폄하하는 것은 정진석 추기경 자신이 스스로 주교회의와 거리를 두고 별개의 이해를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계시의 핵심인 투명원리

3. 교구 사목자는 행정가이기 이전에 교구 공동체의 일원으로 교구민들과 교구 사제들의 벗이며 대화자여야 합니다. 사목자는 일차적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봉사자이기 때문입니다. 봉사직무를 뒤로 한 채 독방에서 군림하며 교구 사제들과의 면담과 대화를 기피하는 것은 교구장으로서 직무유기입니다.

더구나 복음선포의 공기능을 지닌 평화방송과 평화신문을 사사화하여 주교회의의 합의와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신자들과 사제들의 소식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불공정성을 이 기회에 지적하고자 합니다. 또는 교구주보에 실리는 교구장 동정란은 군부관료시대의 홍보물을 연상시키는 시대착오적 발상입니다.

가난한 이웃, 교구민과 함께하는 4대강 보존을 위해서 밤을 지새우는 참 일꾼들을 외면한 채, 권력을 남용한 사람들, 총리, 장관, 시장, 여당대표와 관계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는 소식과 사진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합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율법학자와 헤로데 등 당대 종교인들과 권력자들을 무섭게 비판하신 예수님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런 행업이 물론 교구장의 발상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주변에 직언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과 이를 묵과하는 것은 바로 공범자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밖 갈바리아 언덕에서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 현장이 바로 교회공동체가 태어난 첫 자리입니다. 그곳이 바로 기도와 영성, 전례와 사회적 투신의 기원입니다. 용산참사 현장, 노동자들의 일터, 마구 파헤쳐지는 4대강 현장, 바로 그곳이 십자가 예수님의 자리이며, 우리 교회공동체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현장을 잊은 채 관념으로만 방안에서, 성당 안에서 읊조리는 기도는 한낱 죽은 언어에 불과합니다.

세례 받으러 온 종교계의 지도층인 사두가이와 이른바 사회 원로들인 바리사이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이 회개했다는 것을 행실로서 보여라.”(마태 3,7) 라고 무섭게 꾸짖으신 세례자 요한의 외침, 당대 지도자들을 위선자라고 엄하게 질타하신 예수님의 어록(마태 23장), 무엇보다도 성전 앞의 환전상들과 동물들을 파는 이들의 상을 엎으신 분노의 예수님께서, 바로 오늘의 교구행정, 평화방송․신문, 주보, 명동성당의 새 건물 건립을 위한 정부 당국과의 밀실야합 의혹, 교구 내에서의 독선 비밀주의에 대해 분노하시며 무섭게 꾸짖으십니다. 하느님의 계시는 그 자체로 투명의 원리입니다.

논의와 합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교구의 밀실행정을 이 기회에 지적합니다. 검증과 투명이 우리사회의 길잡이입니다. 평등에 기초한 봉사와 협의를 뒤로한 채 중세 봉건시대의 전 근대적 방식에 머물러 있는 교구장 1인 체제의 독선체제를 이제 우리는 극복해야 합니다.

찢겨진 산하, 울부짖음의 현장 바로 그곳이 자연과학자, 토목가 등 전문인들의 분야를 넘어선 종교의 영역입니다

4. 교구장은 교구 사제와 교구민을 위한 더욱 겸허한 봉사자여야 합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라는 약속을 과연 충실하게 지키고 있는지 되물어야 하며, 정진석 추기경은 그 자신이 사제적 표어로 선택한 성서말씀과 신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겸허한 사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도 아니었고 주 하느님을 알지도 못했던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하시기 위해 이집트 노예 현장을 찾아내려 오신 그 하느님의 길을 사제는 모름지기 따라가야 합니다.(탈출 3,7-8참조)

백성들의 고난과 울부짖음은 하느님께서 내려오신, “굴절되지” 않은 순수한 민심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왜곡되지 않은 민심이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때문에 울부짖음이 있다면 그 자리가 어디이든 바로 그곳이 종교의 영역입니다.

울부짖음의 자리는 과학과 토목 등 모든 전문 영역을 넘어선 곳으로 바로 그곳이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종교의 영역입니다. 울부짖음을 외면하고 과학과 토목 등을 핑계로 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불신이며 인간에 대한 배신입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옷을 입고 교구청에만 안주하는 삶은 봉사적 삶이 아닙니다.

키엘케골과 하비콕스가 얘기한 어릿광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광대 옷을 입고서는 결코 아무리 “불이야!”하고 외쳐도 동네사람들이 웃고 구경만 할뿐 불 끄는 일에 함께하지 않습니다. 회개를 외치는 교회공동체가 시대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채 하늘나라와 회개를 외친다면 그 가르침은 이와 같이 설득력이 없습니다.

마구간에 태어나신 예수님 그리고 백성들과 함께 어울리시면서 종교, 정치 등 기존의 기득권자들을 꾸짖으시면서 함께하셨던 예수님, 끝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우리는 길잡이로 삼아야 합니다. 오늘날 뜻있는 젊은이들과 환경운동가 그리고 길거리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밖에 없는 사제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지금 만일 예수님께서 한국에 찾아오신다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곳, 복음이 예시한 바로 그 곳,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감옥에 갇혀 있는 가장 작은 형제자매들의 터전, 그 고난의 현장으로 달려가실 것입니다.

바로 용산참사 현장, 4대강 난개발 현장 그리고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 등 우리 시대의 부당한 차별과 고통과 고민을 안고 사는 이들의 자리, 바로 그곳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이 현장을 만일 교회공동체가 외면한다면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당대 지도자들을 무섭게 질타하셨던 그 하느님께서 바로 오늘의 사목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분노하실 것입니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떼를 내 놓으라고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겠다.”(에제 34, 10)

정치적 영역도 보편적 구원의 대상입니다

5. 창세기 1,28의 땅의 지배는 생명을 가득 채우고 생명들을 목자의 마음으로 돌보는 조건에 매어있으며 지금의 4대강사업이 이 조건을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주교회의가 공식입장으로 밝힌 바 있습니다.
주교회의의 일관된 현재에 관한 전체 메시지를 자의적 해석을 통하여 부분적이고 굴절된 의미를 내세워 미래의 조건부 메시지로 투영한다면 그것이 혼란이고 분열이며 창조의 거역입니다.

어느 분야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하느님을 향한 탄원까지 그 분야의 고유영역이라고 하여 외면한다면 “전부이시다”(집회43,27)라고 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을 반쪽으로 나누는 일입니다.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그때에 일어났던 정치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치를 떠난 종교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4대강 문제를 “결과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고 한다면 그리스도교가 하느님께 위탁을 받아 하는 선포도 그 내용의 진리성을 종말 후에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충수를 두는 것입니다. 예언직은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선포하는데 그 본질적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게 된 것”(로마8,21)이므로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8,19) 하느님이 주시는 그분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을 지위자본층이 자신들의 생각으로 대신 줄 수 있다고 여기면, 항상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또한 세례자 요한과 같이 감옥에서조차 참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 위하여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고 묻고 포기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찾지 않으려는 목자이며 스스로 목자임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국회 불법날치기 예산에 감춰진 친수구역활용특별법은 악법 중의 악법입니다

6. 이 기회에 우리는 국회에서 여당이 내년도 예산안을 날치기 등의 폭력과 거짓으로 3년간 계속 반복하여 다루고 있는 불의화 부정에 대해 인간과 국민의 이름으로 양심과 도덕의 가치로 단죄하며 거부합니다. 불의와 거짓, 폭력으로 다룬 예산과 제정한 법은 그 자체로 무효이며 웃음거리입니다.

특별히 언급되어야 할 더 큰 내용은 이번 날치기 예산에 얹혀서 함께 처리된 친수구역활용특별법이라는 전 세계 어느 역사에도 유래가 없는 악법입니다. 4대강 예산 22조원으로 인해 국가 채무가 늘어나고 민생예산이 줄어들자 그중 8조원을 수자원공사사업으로 돌려놓고 수공의 그 적자를 보존해 주기 위해서 4대강 모든 수변 2km 이내에 위락시설과 선착장, 주거단지 등을 개발할 수 있는 특혜를 주는 특별법입니다.

똑같은 국가예산을 수공의 몫으로 명목만 바꾸는 숫자놀음도 가소로운 일이지만 전국의 강변을 막개발 하라는 면허를 주면서 친수구역활용특별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말장난입니다. 이것은 마치 군대를 동원하며 삽질하는 부대를 청강부대라 부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정 추기경은 결과는 두고 보아야겠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우리 금수강산이 모두 난개발과 막개발로 더럽혀지고 죽어버린 뒤의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과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비옥한 땅, 강변의 모든 생태계를 죽이는 생명과 종교의 문제입니다.

티베트 선승들이 칩거하는 것은 사람이 돌아다니면 미생물들도 밟아 죽일 수 있다는 염려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이렇게 선승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자연과 생명의 창조질서를 잘 지켜 우리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강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후손들에 대한 선대들의 기본적 의무입니다.

하느님, 정의와 평화를 이룩해주소서. 저희 모두에게 자연 속에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맑은 눈과 양심을 주소서. 정직하게 살게 해 주소서. 아멘.

2010년 12월 13일 / 희망과 속죄의 대림절, 성녀 루치아 축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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